▲ 한 설문조사서 직장인 10명 가운데 1명이 사내에서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해 충격을 주고 있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최근 한 온라인 취업포털 사이트의 설문조사 결과가 화제가 됐다. 직장인 10명 가운데 1명이 직장 내에서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것. 이러한 일들은 대부분 사무실에서 벌어지지만 그 뒤를 잇는 것이 바로 회식자리다. 술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지기도 하지만 술기운을 빌려 상사나 부하 직원에게 속내를 털어놓다 일이 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행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J 씨(31)는 회식이 있으면 임원들이나 사장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거나 중간에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회식자리에서 여러 번 좋지 않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업파트의 막내입니다. 이직한 지 얼마 안 됐죠. 업무파악도 채 안 된 상태인데 부서 특성상 실적에 대한 압박이 많은 편이었어요. 한번은 회식을 하는데 사장님 맞은편에 앉게 됐어요. 술에 취하셔서 그런지 내심 기대가 컸는데 실망이라며 제대로 좀 하라고 훈계를 하셨죠. 임원들까지 합세를 하더군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듣고 있는데 눈에서 불이 번쩍 났어요. 사장이 갑자기 손바닥으로 제 정수리 부위를 세게 내리친 거죠. 정말 기분이 나쁘고 눈물이 핑 돌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J 씨는 그 뒤로도 사장이나 임원들에게 회식자리에서 여러 차례 머리를 맞았다. 결국 회식자리에서 일찍 사라지는 전략을 택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그 자리에서 상을 엎고 싶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면서 “사표를 내지 않는 한 되도록 회식자리에서는 간부들과 멀리, 조용히 있는 게 제일 낫다”라고 말했다. 회식자리의 술은 종종 이성을 마비시킨다. 디자인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C 씨(여·27)도 회식을 하다 상사에게 머리채를 잡혔단다.
“회사에서 새 브랜드를 내놓으면서 기존 유명 브랜드와 합병을 하게 됐어요. 유명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은근히 우리 쪽 디자이너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날도 위험한 발언을 계속 하더군요. 아무리 상사여도 조롱 투의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싫은 법이잖아요. 그래서 듣는 둥 마는 둥 했더니 갑자기 제 머리카락을 확 잡아끄는 거예요. 왜 자기 말에 대답하지 않느냐고 하면서요. 옆에서 말리지 않았으면 뺨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는데 만약 그랬다면 사표 던질 각오를 하고 덤볐을 겁니다. 이후로는 두 브랜드 사람들은 소 닭 보듯 하고 삽니다.”
간혹 군대처럼 과격한 행동으로 부하 직원에게 공포심을 갖게 만드는 폭력적인 상사를 만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이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미디어업계의 K 씨(30)도 그런 부장 밑에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다고 털어놓고 있다.
“업계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위계질서가 엄격하다는 걸 알고 왔어요. 그래서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상사나 사수들한테 더욱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하지만 업무상의 실수까지 완벽하게 대비할 수는 없잖아요. 그럴 때마다 두루마리 휴지가 날아오고, 한번은 부장이 책을 던져서 두꺼운 책에 머리를 맞을 뻔했어요. 대부분은 일부러 빗나가게 던진다는 걸 알고 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두려워서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금속 가공 업체에 근무하는 L 씨(28)도 상사가 무섭다고 고백했다. 업무보고를 할 때마다 긴장의 연속이다.
“원래 성격이 거칠기로 소문난 상사이긴 한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습니다. 의자를 걷어차는 건 일상다반사예요. 조금이라도 의견제시를 하려고 하면 손가락으로 머리를 밀면서 ‘네가 뭘 아느냐’는 식이에요. 수동적인 자세로 업무에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사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진단서라도 끊을 수 있으면 법의 도움을 받을 텐데 그 정도 강도가 아니면 대응도 못하고 속병을 앓게 된다. 교육업체에 다니는 P 씨(여·25)도 상사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경험이 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이사가 불러서 이런 저런 업무 지시를 내리고 있었어요. 그 이사는 평소에도 불같은 성격 때문에 유명했고 부하직원들한테 일을 떠맡길 때가 많았죠. 그날도 역시 본인이 해야 할 업무를 신입사원인 저한테 맡기는 거예요. 제가 하기엔 아직 벅찬 일이니 다시 생각해 달라고 하는 순간 책상에 있는 커피를 저한테 끼얹었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을 당했어요.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 모욕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사무실에서 한참을 울었고 다음날부터 회사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P 씨는 이직 이후에도 직장 내 대인관계에 자신감을 잃었고 매사에 의욕을 다지려고 할 때마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 가슴이 두근거린단다. 그는 “시원하게 복수라도 했으면 깨끗하게 잊어버릴 텐데 꾹 참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라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라며 속상해 했다. 반면 부당한 폭력에 맞서 복직에 성공한 직장인도 있다. 상사의 처사에 반발해 사직서를 제출한 적이 있는 금융업계 종사자 S 씨(여·34)의 이야기다.
“기혼이라 회식자리에 끝까지 남아있는 게 어려워요. 그래서 2차 장소로 이동 중에 가정이 있는 몇몇 직원들과 함께 조용히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상사가 우리 일행에게 연락해 당장 사무실에 집합하라고 했어요.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사무실로 갔는데 가자마자 무릎 꿇고 손들고 있으라고 명령하더군요. 서른이 훌쩍 넘은 데다 가정까지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분위기상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귀가해서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고 치욕스러운 겁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사 게시판에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저는 결국 복직했고 그 상사는 지방으로 좌천됐어요.”
이러한 해피엔딩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50%가 훌쩍 넘는 직장인들의 직장 내 폭력에 대한 대처방법은 ‘그냥 참는다’였다.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한 단면인 셈이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