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현직 선수는 물론 야쿠자까지 연루된 승부조작 파문에 휩싸인 일본의 스모. 파문이 커지자 스모협회는 봄 정기대회마저 취소했다. AP/연합뉴스 |
더 심각한 문제는 승부 조작 파문이 전·현직 스모 선수는 물론 야쿠자까지 연루된 ‘스모 도박’으로 비화되고 있다는 사실. 2월 초 야구 도박판을 벌인 ‘판꾼’ 혐의로 수사를 받던 전직 스모선수의 휴대폰에서 스모 도박을 암시하는 ‘핸디표’를 적은 문자 메시지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스모 도박 규모는 수억엔 대로 드러난 야구 도박 판돈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면 위로 드러나는 스모 도박의 실체를 짚어봤다.
야구 도박을 주동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스모 선수 야마모토·사쿠(35).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야구 도박 이상의 규모로 스모 도박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새롭게 떠올랐다. <닛칸스포츠>에 따르면 야마모토는 2006년에 조직 폭력단 야마구치구미 홍도회로부터 제의를 받아 야구 도박의 판꾼이 된 것으로 밝혀졌다. 홍도회는 경찰의 집중적 감시와 규제를 받는 이른바 ‘지정폭력단’ 중의 하나다.
스모 도박 실태를 고발하는 선수들의 인터뷰도 줄을 잇고 있다. 전직 스모 선수 마쓰이 게스케는 <주간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선수들이 끼리끼리 모여 경마나 경륜처럼 (스모) 도박을 가볍게 즐기는 정도였다. 액수가 커지자 자금이 많은 조직 폭력단 관계자가 노름판으로 들어오게 됐다. 그러면서 (스모) 승부 조작이 늘었다”고 말했다. 폭력단 관계자는 심지어 판을 크게 키운 뒤 선수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가 돈을 잃으면 “승부 조작을 해서 (돈을) 갚아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이렇듯 ‘승부 조작’이 실제로는 막대한 판돈이 오가는 도박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어찌 보면 승부 조작과 도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간 스모계 승부 조작은 매스컴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지만 마땅한 관련법이 없어 처벌에까지 이르진 못했다. 일본의 ‘국기’ 스모의 체면을 훼손하는 추문 정도로만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승부 조작이 스모협회 소속 선수간 승급에 따른 막대한 급여 격차를 해소하는 순기능도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선수들이 서로 돕자는 취지로 골고루 승리를 따내 선수 생활을 연장한다는 얘기다. 소위 ‘생활의 지혜론’이다.
승부 조작과 도박 의혹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흘러나왔다. 번번이 증거가 나오지 못해 주간지의 가십 정도로만 취급됐다. 이를 반증하기라도 하듯 승부 조작과 관련된 수많은 은어와 소문이 떠돈다. 승부 조작을 지속적으로 보도해 지난 2008년에 저널리즘상까지 받은 스모 전문 저널리스트로 다케다 요리마사 씨는 “실태가 알려지면 앞으로 스모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다.
예를 들어 은어로 ‘가칭코’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승부 조작을 하지 않는 정직한 스모 선수를 가리킨다. 진검 승부를 할 때 나는 칼소리인 ‘가칭 가칭’ (의성어로 ‘휙휙’)에서 유래됐다. 이에 반해 ‘주사를 맞고 왔다’거나 ‘주사를 놔준다’ 등은 승부 조작을 일컫는 말로 알려진다. 한마디로 승부 조작을 ‘주사’라고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승부 조작에서 조정자 역할을 하는 ‘꾼’은 여러 선수 및 폭력 조직과의 연락도 담당하기 때문에 머리도 좋고, 성격도 좋으며, 조심성도 있어야 한다. ‘꾼’은 전직 스모선수나 스모 선수 후원회 출신으로 야구 도박꾼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스모 도박을 하려면 ‘꾼’을 찾아 “스모도 하고 있나요?”라고 물으면 될 정도라 한다.
야구 도박의 ‘꾼’에서 이제는 스모 도박판을 벌인 ‘꾼’으로 전락한 야마모토는 불행히도 폭력 조직원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도박판에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간문춘>과 인터뷰한 선수들의 말에 따르면, 야마모토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야마모토에게 노름판 키우는 법 등을 가르치고, 자신은 스모 도박 정보를 얻어 돈을 따갔다고 한다.
스모 선수 후원회 출신 ‘꾼’들은 흔히 ‘다니마치’라 부르는데, 이들은 야쿠자일 가능성이 크다. ‘다니마치’란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의 스폰서를 가리키는 은어로, 메이지 시대 오사카의 ‘다니마치’란 동네에서 의사를 하던 이가 스모의 열렬한 팬으로 무료로 선수들을 진료해줘 생겨난 말이다. 다니마치는 지방 순회 대회 시 숙소 선택 및 배정, 경기 의상, 상금, 선수 승급 등 스모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 일간지 <사이조>에 따르면, 심지어 스모 선수들의 술자리와 여자까지 관리하는 것이 바로 다니마치라고 한다. 실제 야구 도박이 한창 문제가 됐던 작년, 한 야구 선수가 오사카의 폭력단인 사카우메구미 간부급 조직원과 자주 룸살롱으로 놀러 다니다가 사진이 유출돼 문제가 된 바 있다. 다니마치와 술을 마시며 야구 도박과 관련된 정보를 주고받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스모 도박의 방식은 야구 도박처럼 핸디를 얹는 것이라고 한다. 스모 경기가 열리는 날에 ‘핸디캡(강자에게 주어지는 불리한 조건)’이 미리 정해진 ‘핸디표’가 나온다. 이를테면 동서 두 팀으로 나뉜 스모 경기에서 판꾼이 미리 ‘동쪽 1’이란 핸디캡을 정해주면, 동쪽 팀이 핸디캡 1을 얹고도 이겨야만 돈을 딸 수 있다. 그러니까 동쪽 팀에 베팅했을 때 동쪽 팀이 서쪽 팀을 5 대 4로 이겼다하더라도, 핸디캡을 적용하면 비기는 셈이라 따는 돈은 없다. 야구 도박보다 핸디캡이 크고 승부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스모 도박의 규모는 야구 도박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스모 도박의 고객으로는 전·현직 운동선수 및 연예인, 기업인은 물론 일반인도 대거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도박에 뛰어들어 돈을 따게 되면, 수수료로 판꾼에게 딴 돈의 10%를 내야 한다. 선수 시절 성적이 바닥이었던 어느 전직 스모 선수는 ‘노름판꾼’으로 활약하면서 수수료로 떼돈을 벌어 벤츠를 굴리며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간 ‘국기’라는 위상 때문에 금기처럼 여겨졌던 스모 도박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자 스모협회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번 봄 경기 취소로 인한 스모협회의 손실액은 입장료와 방송 중계료, 경기시설 대여 취소비 등 총 18억 엔(약 25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와중에 전직 스모 선수 다마카이리키 쓰요시(45)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예 “스모를 합법적인 도박으로 만들자”는 솔직한 제안을 써 화제가 되고 있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