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6일 오전 ‘청해대 휴가’ 이후 첫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자신의 승리에 일조했던 개혁성향 세력들이 집단행동으로 발목을 잡고 나서는가 하면 방미 중 행보를 두고 “노무현이 변했다”며 벌써부터 등을 돌리고 나서면서 초래된 상황이다.
심지어 진보적 지식인 그룹의 원로인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미국방문을 전후해서 나타난 노 대통령의 발언이나 행동을 보면 변한 것이 없고 무식한 것이다”며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청와대 등 권력 핵심부도 현재의 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물류대란을 야기시킨 화물연대의 파업과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시행을 둘러싼 전교조의 연가투쟁 계획 발표 등에 이어 시내버스 노조 등도 파업 움직임을 보이고, 양대 노총도 ‘6월 총력투쟁’을 선언하는 등 앞으로도 이익집단의 단체행동이 끊이지 않을 것이란 점.
상황이 이처럼 엄중하지만 ‘행정의 달인’이라는 고건 총리가 이끄는 내각은 현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해 노 대통령에게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지우고 있다.
또 개혁세력 내에서 노 대통령의 미국-이라크전 파병 결정과 방미 기간 중 친미 행보 및 대북 포용정책 수정 시사 발언 등을 계기로 그의 이념적 ‘변절’을 비판하는 주장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은 대목. 노 대통령의 개혁성이 사상·이념적으로 도전받을 경우 20~30대 젊은 지지층의 이탈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측근과 가족 등 ‘주변 문제’도 난제다.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의혹 사건과 관련해 핵심측근인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는 데다 형 건평씨의 부동산 투기의혹도 새롭게 불거진 상황.
특히 건평씨 문제에 대해서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청와대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직접 당사자들을 취재하라”고까지 할 정도로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신당 갈등’도 노 대통령을 괴롭히는 요인. 당·정 분리를 내세워 “당에서 알아서 슬기롭게 해결하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돌아가는 형편은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가 지난 25일 ‘신당 불참’을 선언하면서 대북송금 특검법 수용결정을 포함한 대북정책 등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을 강도 높게 비판해 고민만 깊게 만들고 있다.
특히 신당을 주도하고 있는 신주류 내에서도 강·온 양 그룹 간에 여전히 엇박자를 보이며 노 대통령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출범 100일도 되기 전에 지지층 이탈과 당·정의 총체적 난조로 가히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은 노 대통령은 과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며 해법을 가다듬고 있을까.
청와대 한 관계자는 “타고난 낙천주의자인 노 대통령도 최근 일련의 국정난맥에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으며 국정운용의 전반적 틀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며 “특히 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 경남 거제 저도의 군 휴양시설인 ‘청해대’에서 2박3일간의 휴가를 보내며 위기 돌파방안의 얼개를 이미 마련한 것으로 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청해대 구상’이라 할 만한 노 대통령의 위기극복책이 빠르면 취임 100일인 6월4일을 전후한 기자회견에서 뼈대를 드러낼 것이며 그에 앞서 신당과 관련해서는 27일 민주당 의원들과의 만찬에서 입장표명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측근들의 문제도 노 대통령의 고민거리다. 검찰 에 출두하는 안희정씨. | ||
아울러 그동안 국정운용과 관련해 제기된 ‘아마추어리즘’과 ‘국정시스템 부재’에 대한 비판을 일부 수용하고 정부와 청와대의 관계 재설정 등 대안을 내놓을 것이란 설명.
한 비서관은 “노 대통령은 정부 출범 후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개혁의지도 좋지만 국정운용에는 ‘효율’과 ‘경험’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체득해 가고 있다.
약간은 이상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에서 점차 현실주의자로 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방문에서 돌아와 국가인권위원회의 수정 권고에도 불구하고 NEIS를 교육부 원안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한 것이 단적인 예다.
지지층들에게 과거 인권변호사, 개혁적 정치인이었던 노무현과 국정을 이끄는 대통령 노무현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달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다”면서 “특히 논란이 되고 있는 친미 행보 등과 관련해서도 앞으로도 국익을 위해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비슷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 대통령은 이익집단들이 정부의 권위와 역할을 인정한다면 대화는 언제든 환영이지만 그 이상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할 것이며 국민들에게 이 같은 원칙을 적극 알릴 것이다. 아울러 그동안 화물연대 파업 등 이익집단의 불법행동에 정부가 초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점에 대한 비판은 수용하되 향후 관계 부처가 제대로 역할을 못한다면 청와대가 주도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주변 문제’와 정치권 사정 논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검찰과 법원의 수사와 판단에 맡긴다”는 원칙론을 재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민정라인의 한 관계자는 “안 부소장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나 건평씨를 둘러싼 의혹에 대해 노 대통령이 제시한 가이드 라인은 ‘청와대는 일절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며 “민주당 구주류 인사들에 대한 ‘표적 사정’ 주장에 대해서는 노 대통령이 이를 ‘신정부 증후군’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 ‘바라지 않는다’고 한 점을 상기해 보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 ‘주변 문제’에 대한 한나라당의 공세가 ‘위험수위’에 이르면서 청와대의 기류도 달라지고 있다. 야당이 대선자금 관련설까지 주장하며 의혹을 부풀리고 있는 만큼 청와대도 나름대로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이와 관련, 청와대는 야당이 새로운 의혹을 제기한 노건평씨의 일부 부동산 등에 대해 사실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당 해법’은 노 대통령이 가장 고심하고 있는 부문. 현재 당내는 물론 청와대 참모그룹 역시 신당의 창당방식과 포괄범위, 시기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정치개혁과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서는 신당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호남권의 이반 등 전통적 지지기반의 급격한 이탈을 불러와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신당 문제 역시 내년 총선에서 신당이 독자적으로든, 다른 세력과의 연합으로든 다수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현실적인 목표에 따라 해법이 도출될 것이며 그에 따라 ‘노심’(盧心)의 향배가 결정될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신기남 천정배 의원 등 신주류 강경파들은 신당논의가 구주류측의 발목잡기에 걸려 더 이상 답보할 경우 탄력을 잃을 것이라며 ‘분당 불사’의 각오로 신당 창당을 강행해야 한다며 노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반면 신주류의 좌장격인 정대철 대표와 김원기 고문은 “온몸을 던져서라도 분당은 막겠다”는 입장이어서 노 대통령을 선택의 고민에 빠뜨리고 있다.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가급적 신당 문제에 자신이 개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태가 해결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은 이와 반대로 치닫고 있어 딜레마”라며 “지금으로서는 노 대통령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그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