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기영 전 사장(왼쪽). 최문순 전 의원 |
◇엄기영 전 사장
지난 2일 강원지사 출마 선언을 하는 엄기영 전 MBC 사장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간 자신의 행보에 대한 여론을 의식한 듯 엄 전 사장은 “그동안 강원도의 목소리가 중앙정부와 국회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강원도민을 위한 더 큰 정치, 더 힘 있는 도정을 펼치려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는 출마의 변을 밝혔다. 그동안 강원지사 출마설에 대해선 입을 닫아왔던 그가 결국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선언한 것.
그간 엄 전 사장을 바라보는 여론에는 의문부호가 따라다녔다. 정치권에서는 이미 지난해 10월 재보선 이전부터 엄기영 전 사장의 강원지사 출마설이 나돌았지만 엄 전 사장은 이러한 소문에 대해 극구 부인해왔었다. 결국 이광재 전 강원지사가 지난 1월 26일 대법원 판결로 지사직을 상실하게 되면서 이번 4·27 재보선에서 강원지사 선거가 확정되자 또다시 엄 전 사장의 이름이 정가에 거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당시 그는 이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재보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던 그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최근 강원지역에 머물러왔다. 끝까지 엄 전 사장이 민주당으로 입당하기를 희망했던 민주당은 그의 한나라당행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야권의 비판과는 별개로, 엄기영 전 사장이 걸어온 행보를 살펴보면 그의 한나라당행이 의아하다는 반응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게 된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MBC에 입사한 엄 사장은 파리특파원 등 기자로 활동하다가 1989년부터 <뉴스데스크>의 스타 앵커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2008년 3월 MBC 사장에 취임하면서 재임 기간 동안 이명박 정부와 강하게 대립각을 세운 바 있다.
엄 전 사장은 MBC 사장으로 취임한 직후 처음 단행한 봄 프로그램 개편에서 ‘공영성 강화’를 내걸고 “시청률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공익적으로 편성 변화를 꾀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MBC의 대표 프로그램을 상징하던, MBC 사옥 외벽에 걸렸던 드라마 <이산>의 현수막도 <뉴스데스크> 현수막으로 바꾸는 등 뉴스보도 프로그램을 강화하겠다는 엄 전 사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이 무렵은 ‘MBC 민영화’라는 화두가 정치권에서 거론되기 시작할 즈음. 하지만 엄 전 사장은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도 “MBC는 지금처럼 공영방송으로 존재하는 게 가장 좋다”며 민영화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친여 성향의 인사들로 구성된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와 끊임없이 갈등을 겪으며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지난 2010년 2월, 취임 2년 만에 결국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당시 퇴임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퇴한 엄 전 사장 주변에서는 “취임 이후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그는 현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은 인물이었다. 엄 전 사장은 취임 초부터 MBC 이사 선임 문제를 사장에게 맡겨달라는 의지를 분명히 했지만, 결국 여권 추천 이사들로 이사진이 구성되면서 계속되는 갈등을 겪은 바 있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 파동과 <PD수첩> 사태 와중에는 한나라당 의원들로부터 ‘사퇴’ 권고를 받기도 했다. MBC 공영화를 주장했던 엄 전 사장은 미디어법 통과에도 강하게 반대했었다.
그런가 하면 엄 전 사장은 현 정부와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MBC 내부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 당시 여권에 대한 비판적 클로징 멘트로 논란이 됐던 신경민 앵커를 교체했던 일이 그 예다. 그러나 결국 지난 2010년 2월 8일 엄 전 사장은 “어떻게 해서든 어려움을 뚫고 MBC를 두 번째 반세기의 길목에 안착시키고 나가자는 것이 각오였지만 지금의 상황은 사장으로 남는 것이 MBC의 위상에 누가 될 수 있는 국면인 것 같다”며 36년 동안 몸담아온 MBC에서 물러났다. 당시 그는 “평가는 역사와 후배들에게 맡긴다”며 고단했던 2년간의 사장직을 내놓았다.
이후 지난해 6·2지방선거 출마설을 시작으로 정치권 영입설이 나돌았지만 그는 “당분간 쉬고 싶다”며 정치권에 대해 거리를 두어왔다. 정가에서 ‘멀어져’ 있던 그에게 민주당은 영입작업을 추진하며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내왔고, 지난해 10월 재보선을 앞두고서는 한나라당 역시 영입의사를 타진하며 그는 정치권의 ‘영입대상’ 리스트의 ‘0순위’를 차지해 왔다. 그리고 결국 그의 선택지는 한나라당으로 귀결됐다.
이와 같은 결심의 배경을 놓고 도지사 당선보다는 ‘당선 이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다. 중립성향의 한 정치권 관계자는 “방송사 출신으로 여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엄기영 전 사장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광재 전 지사가 야권 소속 지자체장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보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엄기영 전 사장 역시 “그간 강원도의 목소리가 중앙정부와 국회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강원도민을 위한 더 큰 정치, 더 힘 있는 도정을 펼치려 한다”면서 “동계올림픽 유치 등 강원도 핵심 현안을 위해서는 정부와 여당의 전폭적 지원이 필수”라며 한나라당 입당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민주당과 기타 야권에서는 엄기영 전 사장의 행보에 대해 쓴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최문순 전 의원은 “한나라당이 언론을 장악하려고 쫓아낸 인물을 영입한 것은 집권여당으로서 나라를 운영할 최소한의 윤리도 갖추지 못한 행위인 데다 엄 전 사장은 자신을 탄압하고 쫓아낸 정당에 투항해서 강원도백이 되겠다고 한다”고 비판했다. 한명숙 전 총리는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MBC도 못 지키면서 과연 강원도를 지킬 수 있을까요”라 비판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엄기영 전 사장이 겪어온 삶은 야권 성향에 더 가깝지 않나. 이명박 정부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인 그가 한나라당을 택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MBC 노조 역시 자신의 ‘수장’이었던 엄 전 사장의 행보에 대해 ‘인간적인 배신감을 넘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지울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판을 무릅쓰고 정치인으로 변신한 엄 전 사장이 과연 강원도민에게는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 최문순 전 의원
엄기영 전 사장과의 ‘맞대결’에 도전장을 내민 민주당 최문순 전 의원의 이력은 여러모로 엄 전 사장과 닮아 있다. 이번 재보선에서 각각 여야의 예비후보로 소속을 달리했지만, 최 전 의원은 엄기영 전 사장의 중·고교(춘천중·춘천고) 5년 후배이며 MBC 10년 후배인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MBC의 사장직은 최 전 의원이 엄 전 사장에 앞서 오르게 된다. 서울대 영문학 석사를 나온 최 전 의원은 1984년 MBC에 입사한 이후 사내 노조위원장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 위원장을 거쳐 산별노조로 전환한 전국언론노조 초대위원장을 거친 뒤 지난 2005년 2월부터 3년간 MBC 사장을 역임했다.
MBC 사장에 임명됐을 때 최 전의원은 만 49세의 ‘젊은’ 나이였고, 임원 경력도 없는 보도제작국 부장 신분이었다. 노조활동을 이끌며 정권의 낙하산 인사에 반대하는 파업을 주도했다가 해직된 바 있는 있는 ‘개혁론자’였던 그에 대해선 MBC 내부 평직원들의 평가와 신뢰도 높았다.
종종 드라마 촬영장을 직접 방문해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을 격려하는 ‘친절한’ 사장님의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을 정도. 2005년 5월경 기자는 MBC 드라마 <신입사원>의 촬영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현장을 찾았던 최문순 사장을 마주쳤다. 이날 그는 취임 50일을 맞아 연 기자간담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인근에서 촬영 중이던 드라마 팀을 ‘깜짝 방문’하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때 최 전 사장이 연신 허리를 굽히며 스태프들에게까지 ‘수고하십시오’라는 인사를 몇 차례나 건네며 현장을 떠났던 기억이 난다.
최 전 사장이 정치에 입문한 것은 2008년 18대에서 민주당의 비례대표 의원이 되면서부터다.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최 전 의원의 ‘성실성’은 높게 평가받았다. 국정감사 NGO모니터단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 경실련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 등에 선정되기도 했던 그는 ‘방송인’ 경력을 살려 줄곧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언론 개혁을 위한 의정활동에 주력했다.
최문순 전 의원은 출마를 결심하기까지 적지 않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에서도 엄기영 전 사장의 영입을 추진했던 만큼 최 전 의원은 애초부터 출마 의사가 없었다는 후문이다. 최 전 의원은 막판까지 엄기영 전 사장을 향해 “민주당으로 온다면 후보 자리를 양보하겠다”며 공개적으로 영입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엄기영 전 사장이 한나라당 입당 쪽으로 가닥을 잡으며, 민주당에서도 ‘상징적 대결’을 성사시키기 위해 최문순 전 의원의 설득에 들어갔던 것. 최 전 의원 측 관계자는 “고민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그간의 심적 고통을 전하기도 했다.
최문순 전 의원의 출마에 대해 학교와 직장 선배였던 엄기영 전 사장은 “고교와 언론생활을 함께한 사랑하는 후배로 능력과 자질을 높게 평가한다”면서도 자신에게 민주당 후보 자리를 양보겠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말을 좀 쉽게 한다”며 날을 세우고 있다. 엄 전 사장으로서도 최 전 의원과의 맞대결이 성사될 경우 적잖이 부담될 수밖에 없는 선거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모두 공식 후보로 확정되려면 모두 당내 경선을 거쳐야 한다. 한나라당에서는 엄기영 전 사장과 함께 최흥집 전 강원도 정무부지사, 이호영 전 이명박 대통령후보 특보로 경선 후보가 압축됐고, 민주당은 최문순 전 의원 외에 조일현 전 의원과 이근식 강원부지사 등이 경선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강원도민의 심정도 남다를 것으로 보인다. 이광재 전 지사에 대한 동정론과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라는 현실적 문제가 각각 어떻게 강원민심을 움직이게 될지 그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맞대결 구도’ 여론조사 살펴보니
과연 여야 예비후보로 나선 엄기영 전 사장과 최문순 전 의원에 대한 강원도민의 민심은 어떨까.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엄 전 사장이 최 전 의원을 지지율에서 약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서치뷰·뷰앤폴이 지난 2월 26~27일 ‘1 대 1 맞대결’ 상황을 가정해 강원도민 1132명을 대상(오차범위 ±3.1%p)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엄 전 사장이 지지율 42.2.%, 최전 의원이 35.3%로 엄 전 사장이 6.9%p 앞섰다. 하지만 오차범위를 감안하면 ‘박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역대 선거마다 민심의 바로미터가 된 30대(엄기영 전 사장 37.0%, 최문순 전 의원 39.1%)와 40대(엄기영 전 사장 35.0%, 최문순 전 의원 45.3%)에선 오히려 최 전 의원이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 선거결과를 예측하기가 더욱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0대의 경우 최 전 의원이 엄 전 사장보다 무려 10.3%p 앞서고 있어 눈길을 끈다. 반면 엄 전 사장은 20대와 50대 이상에서 상대적으로 지지율이 높았다. 이와 같은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전문가들은 엄기영 전 사장의 높은 인지도가 한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대부분 “엄 전 사장의 승리를 낙관하긴 어렵다”고 말하고 있어 ‘박빙의 승부’가 펼쳐질 가능성을 높게 한다. 같은 조사에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강원도 지역경제가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를 물은 결과 ‘좋아졌다’는 답은 33.1%, ‘나빠졌다’는 답은 57.8%로 나타났다. 정당지지도는 한나라당(42.7%)이 민주당(28.0%)에 비해 훨씬 높았으나 강원도민의 현 정부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대해 한 정치컨설턴트는 “최문순 전 의원의 경우 네거티브 전략보다는 강원도가 처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하고, 엄기영 전 사장의 경우 인지도는 높지만 한나라당 입당에 대한 비호감을 갖고 있는 여론이 높다는 점을 신경 써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