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A/연합뉴스 |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카다피는 비행기를 타고 물 위를 나는 것을 매우 무서워했으며, 한 번에 8시간 이상 날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장거리 여행은 피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2009년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했을 때에는 일부러 직항편을 이용하지 않고 포르투갈에서 1박을 한 후 다음 날 다시 출발하기도 했다.
또한 고소공포증이 심해서 고층 건물을 못 올라가며, 계단 역시 한 번에 35개 이상은 못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해외 순방길에 오를 때마다 지니고 다니는 물품 중에는 아랍의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베두인 텐트’가 빠지지 않는다. 호텔에 묵는 대신 땅바닥에 텐트를 치고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가끔 낙타와 말을 데리고 다니면서 텐트 앞에 풀어 놓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내 텐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아랍 고유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서다”라고 말하곤 했다.
가령 1989년 세르비아 벨그라드 아랍정상회의에 참석했을 때에는 호텔 앞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낙타 6마리와 말 2마리를 방목시켜 놓았다. 벨그라드에 머무는 내내 낙타에서 짠 우유를 마셨던 그는 떠나면서는 베오그라드 동물원에 낙타를 기증하고 돌아갔다. 2007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에도 텐트에 묵는 습관은 계속 이어졌다. 5성급 호텔인 마리니 호텔 앞마당에 텐트를 쳤던 그는 낙타 한 마리를 텐트 앞에 풀어 놓고는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낙타를 구경시켰다.
2009년 로마 방문 때에는 아예 시내 중심의 공원에 텐트를 쳤으며, 같은 해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 때에도 센트럴 파크에 텐트를 설치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가 미국 측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부동산 갑부인 도널드 트럼프의 배려로 세븐스프링스에 위치한 그의 사유지 한 구석에 텐트를 설치했으며, 다음 날 뾰로통한 얼굴로 유엔총회에 나타나서는 “잠자리가 불편했다”며 투정을 부렸다.
또한 그는 경마와 스페인의 플라멩고에 푹 빠져 있으며, 뉴스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서는 “두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생국을 세우는 길 뿐이다. 그 나라의 이름은 ‘이스라틴’이라고 지으면 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때 누구보다도 축구를 좋아하는 축구광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축구를 경멸하면서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독설가로 유명해졌다. 이유는 한때 이탈리아 1부 리그 페루지아에서 뛰었던 셋째 아들 사디가 스테로이드 양성 반응으로 퇴출된 데 대한 일종의 복수심이었다.
카다피의 이런 괴팍한 성격은 이미 국제무대에서도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다. 특히 국제적인 주목을 받을 때면 더욱 광기가 폭발했는데 가령 2004년 튀니지 아랍정상회의 때에는 회의 내내 시가를 입에 문 채로 앉아 있으면서 다른 나라 지도자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2009년 카타르 회의 때에는 마이크를 움켜쥐고 사우디 국왕을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는 일부러 발바닥을 보이고 앉아 자신이 얼마나 서방 국가들을 조롱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아랍 문화에서는 상대에게 발바닥을 보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간주된다.
항상 극적인 말과 행동을 하길 좋아하는 그는 똑같은 상황도 늘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곤 했다. 1988년 트리폴리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400명의 수감자들을 석방시키겠노라고 발표한 그는 곧 불도저로 교도소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쇼를 연출했다.
괴상한 패션 스타일도 늘 화젯거리다. 가끔 화장을 하고 나타나는가 하면, 머리는 늘 염색을 하거나 젤을 듬뿍 발라 멋을 부리곤 한다. 미 외교전문에 ‘허영심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는 그는 “나는 거울을 거의 안 본다”는 자신의 말과 달리 외모에 매우 신경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톡스 시술도 여러 차례 받았는가 하면, 2008~2009년 사이에는 머리카락 이식 수술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카다피의 사생활은 다름 아닌 그의 곁을 둘러싸고 있는 여자들에 관한 것이다. 처음 위키리크스를 통해 존재가 알려진 우크라이나 출신의 할리나 콜로트니츠카(38)는 지난 9년 동안 그림자처럼 카다피의 곁을 지켜왔던 전담 간호사였다. 미국의 외교 문서에는 “카다피는 관능적인 이 금발의 간호사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심하게 의존한다”고 적혀 있었다.
카다피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동행했던 그녀는 개인 간호사 4명 중 카다피가 가장 아꼈던 여성이었으며, 그녀 역시 카다피를 끔찍이 여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그를 ‘아빠’라고 불렀으며, 지난달 27일 황급히 고향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만난 기자에게는 “카다피 없는 인생은 처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다피가 그녀를 신뢰하게 된 것은 자신을 향한 암살 기도를 막다가 부상을 당한 경호원을 극진히 보살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다. 그 후 그녀는 카다피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얼굴이 그려진 시계를 선물 받는 등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런 까닭에 카다피와 연인 사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녀는 이를 절대 부인하고 있다. 카다피의 곁을 지키는 간호사가 전부 우크라이나 여성인 이유에 대해 할리나의 딸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카다피는 리비아 여자들을 믿지 못했다”고 말했다.
간호사들 외에도 카다피 곁을 철통 같이 지키는 여성들로는 이른바 ‘처녀 경호부대’가 있다. 모두 350여 명의 여성들로 이루어진 이 부대는 카다피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100% ‘숫처녀’들이다. 모두 특수훈련학교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며, 소화무기 전문가일 뿐 아니라 각종 무술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1998년 자동차 퍼레이드 중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뻔했던 카다피는 대신 몸을 던진 한 여성 경호원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사건으로 그 여성은 목숨을 잃었으며 7명이 부상당했다.
여성 경호원들은 카키색이나 푸른색 제복을 입고 머리에는 베레모를 쓰고 있으며, 핸드백 대신 어깨에는 늘 AK-47 자동소총을 메고 다닌다. 그럼에도 여성적인 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을 하는가 하면, 향수를 뿌리거나 보석을 착용하며 매니큐어를 바르고 하이힐을 신기도 한다.
여성 경호부대를 조직한 이유에 대해 카다피는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자신의 의지”라고 말하면서 “여성들도 전투 시 적들의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그는 해외 순방길에 오를 때마다 여성 경호원들을 수십 명씩 대동하고 다니면서 뽐내곤 했다.
이밖에도 그는 몇 년 전부터는 에스코트걸과 관련된 괴상한 취미를 하나 갖기 시작했다. 2009년 세계식량회의 참석차 로마를 방문했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취미는 에스코트걸들을 단체로 불러서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선교 작업이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에스코트걸 웹사이트를 통해 200명의 여성들을 초청한 그는 조건으로 키 170㎝에 나이는 18~35세여야 한다는 점과 함께 미니스커트나 배꼽티는 절대 금물이라는 점을 제시했다. 당시 여성들은 카다피의 부름에 응하는 대가로 각각 50유로(약 7만 7000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성대한 파티와 술과 음식을 기대했던 에스코트걸들은 카다피가 머물고 있는 텐트에 도착해서는 뜻밖이다 못해 황당한 경험을 했다. 파티는커녕 두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카다피의 지루한 설교만 듣고 왔기 때문이다. 카다피는 현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그리고 서방 세계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대해 비난하면서 “그들은 여성들을 아무 때나 싫증나면 바꿀 수 있는 집안의 가구처럼 여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면서 여성들 모두에게 코란을 무료로 나누어 줬다. 또한 일일이 서명을 한 자신의 저서인 <그린북>을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후부터 에스코트걸들을 대상으로 하는 카다피의 이런 선교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스스로 ‘문화 방문’이라고 부르는 이 선교 활동은 지금까지 여섯 차례 정도 있었으며, 모든 여성들은 에스코트걸 에이전트를 통해 모집했다. 개종을 하는 여성들에게는 현금이나 일자리, 혹은 부동산 등 후한 보너스가 주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에선지 점차 카다피의 ‘문화 방문’에 참석하려는 여성들의 수는 늘어났다. 한 관계자는 “대기명단이 점점 길어졌다. 앞으로는 이탈리아 외에 다른 나라의 여성들을 대상으로도 활동을 시작해볼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카다피의 자녀들은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무하마드와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6남 1녀, 그리고 입양 자녀 둘을 포함해 모두 10명이다. 이 가운데 입양한 딸 한나는 1986년 미군의 트리폴리 폭격 때 사망해서 현재는 9남매만 생존해 있다.
교사였던 첫 번째 부인과의 결혼은 6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다. 부모의 뜻에 따른 정략결혼인 탓에 애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아내인 간호사 출신의 사피야 파르카슈는 달랐다. 카다피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자인 사피야는 트리폴리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카다피를 만났으며, 1969~1970년 무렵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과 사피야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현재 의견이 분분한 상태. 그녀가 리비아 출신이 아닌 보스니아 남부의 모스타르 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1960년대 카다피가 모스타르 공군사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머물던 당시 만났다고 주장한다.
카다피 가족 개개인의 성격과 인생을 들여다보면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8형제들은 모두 사고뭉치에 흥청망청하는 화려한 생활과 파티를 즐기는 쾌락적인 성격이며, 걸핏하면 폭행 및 음주 사고에 휘말려서 외교적 마찰을 빚곤 했다.
가령 한때 페루지아에서 축구선수로 뛰었던 3남인 사디는 걸핏하면 유럽으로 건너가 마약 및 음주 소동을 일으키면서 경찰들과 충돌을 벌였으며, 현재 국가안보자문을 맡고 있는 4남인 무아타심 역시 열렬한 파티광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머라이어 캐리, 비욘세, 어셔 등 팝가수들을 초청해 호화로운 파티를 연 사실이 위키리크스를 통해 알려지면서 구설에 올랐다. 캐리의 경우 네 곡을 부르는 데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그리고 비욘세와 어셔에게도 노래를 불러주는 대가로 각각 100만~200만 달러(약 11억~22억 원)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비아 국영선사를 소유하고 있는 5남인 한니발은 가장 사건사고를 많이 일으킨 아들로, 2001년 이탈리아 경찰 폭행, 2003년 스위스에서 직원 폭행, 2004년 파리에서 과속 역주행, 2008년 스위스 호텔 종업원 폭행, 2009년 아내 앨라인 폭행 등으로 여러 차례 외교적 긴장감을 조성하곤 했다.
외동딸인 아이샤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북아프리카의 클라우디아 쉬퍼’라고 불릴 만큼 빼어난 외모를 자랑한다. 또한 아이샤는 얼마 전에는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연인 사이라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미성년 성매수 사건을 비롯해 돈을 주고 매춘부들과 ‘붕가붕가 파티’를 벌이는 사실이 들통 나서 망신이 뻗쳤던 베를루스코니는 당시 TV 회견을 통해 “나는 지금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여성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결백을 주장했다.
이탈리아의 일간지 <라 스탐파>의 주장에 따르면 이 새로운 여인은 바로 카다피의 외동딸 아이샤이며, 둘은 오래 전부터 친하게 지내왔다가 최근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샤가 지난 2006년 사촌과 결혼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마도 지금 당장 베를루스코니와 식을 올리는 건 무리가 아닐까 하는 성급한 추측도 나오고 있다.
9남매 중에 카다피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은 차남인 사이프다. 건축가인 그는 카다피와 달리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지지하며, 친서방 정책을 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위기를 빌미로 사이프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려 들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카이로의 한 외교관은 독일 <빌트>를 통해 “사이프는 아버지가 국제사회에서 영원히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과 권력을 지키려면 그는 지금 당장 아버지를 몰아내야 한다. 혁명군이 트리폴리를 장악하기 전에 먼저 말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