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법정의 원칙이란?
IBK기업은행에 따르면 테러 피해자들이 한국 법원을 통한 소송을 원할 경우 오는 7월 28일(미국시간 기준)까지 미국 법원에 관련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미국 법원은 ‘불편한 법정의 원칙’을 내세워 각하 결정을 내렸다. 불편한 법정의 원칙이란 소송이 제기된 법원보다 다른 국가의 법원에서 재판이 이뤄지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소송을 각하할 수 있다는 영미의 판례법이다.
불편한 법정의 원칙의 대표적인 사례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일명 ‘땅콩회항’ 사건이다. 당시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은 사건이 발생한 미국에서 조현아 전 부사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법원은 조 전 부사장과 박 전 사무장이 모두 한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불편한 법정의 원칙을 들어 사건을 각하했다. 이후 박 전 사무장은 한국 법원을 통해 소송을 제기했고, 서울고등법원은 대한항공 측이 박 전 사무장에게 7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번 테러 피해자들도 IBK기업은행으로부터 배상액을 받고 싶으면 한국 법원을 통해 소송을 진행해야 한다. 7월 21일 현재까지 소송 진행 여부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이와 관련, 법조계 관계자는 “불편한 법정의 원칙은 편의상 관할 국가를 바꾸라고 하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란 중앙은행의 IBK기업은행 계좌는 어쨌든 이란 측 재산이기 때문에 강제 집행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라고 전했다.
#외교관계 사이에 낀 IBK기업은행
문제는 IBK기업은행이 이란 중앙은행 계좌 내 자금을 테러 피해자에게 전달하면 이란과의 외교 관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현재 이란과는 거래를 할 수 없지만 테러 피해자들은 대부분 케냐인이나 미국인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IBK기업은행이 소송에서 패해 해당 자금을 미국에 보내면 문제될 것은 없다”면서도 “기획재정부나 외교부의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고, 이란 정부도 보고만 있을 리 없기 때문에 법원에서 가볍게 판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이란 중앙은행은 2010년 개설한 IBK기업은행과 우리은행 계좌를 통해 원유 수출 대금을 받아왔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2018년 이란 중앙은행을 제재 명단에 올리면서 해당 계좌를 통한 거래도 중단됐다. 국내 은행에 동결된 이란 자금은 70억 달러(약 8조 원) 수준으로 알려졌으며 이란 정부는 해당 자금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난 7월 20일 윤강현 주이란 한국 대사를 직접 만나 자금 반환을 요청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미국의 불법적이고 공격적인 제재로 인해 최근 몇 년간 악화된 한국과 이란의 관계는 가능한 빨리 해결돼야 한다”며 “한국의 은행에 동결된 자금을 이용해 코로나19 백신, 의료기기, 제약 장비 등을 구입하려고 하지만 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해당 자금을 사용하는 것은 이란의 명백한 권리”라고 강조했다.
이란 정부에 따르면 윤 대사는 이날 “현재 상황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어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쳐왔지만 오늘은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우리는 이란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관련 협상에서 좋은 성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관계 진전을 위한 방안을 준비할 것”이라고 답했다.
우리은행에도 이란 중앙은행의 계좌가 개설돼 있지만 테러 피해자들은 IBK기업은행 계좌의 자금만 요구하고 있다. 우리은행에 예치된 이란 중앙은행 측 자금이 IBK기업은행에 비해 적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각 은행은 이란 중앙은행의 정확한 예금액은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은행에 예치된 이란 측 자금은 IBK기업은행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테러 피해자들의 소송 제기는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전했다.
국내에서 소송이 진행되고 패소해 이란 중앙은행의 예금이 테러 피해자들에게 넘어가면 이란 정부가 자금 반환을 위한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이란 정부는 자금 반환 관련 국제소송을 수차례 언급해왔다. 이와 관련, IBK기업은행 관계자는 “세부사항은 소송 중인 사항으로 안내가 어렵다”라고 전했다.
'224명 사망' 케냐·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는?
1998년 8월 7일, 주케냐 미국 대사관과 주탄자니아 미국 대사관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수백 명이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주케냐 미국 대사관 관련 213명, 주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관련 11명, 총 224명이다.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테러 피해자와 유가족 약 570명은 미국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2014년 이란 정부와 수단 정부에게 80억 달러(약 9조 2000억 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알카에다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한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수단 정부는 지난해 주케냐·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테러 및 2000년 미국 구축함 USS콜 폭파 사건 피해자에게 3억 3500만 달러(약 3850억 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미국도 2020년 12월 수단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 그러나 이란 정부는 아직 배상을 하지 않았고, 현재도 미국 테러지원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