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이 없을 때면 전기도 끊기도 가스도 끊겼다. 비가 오면 구정물이 방으로 넘쳐흘렀다. 그들의 다음 운명은 차별이었다. 딸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술집에 나가 남자들의 노리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북에서 수의사였다. 오빠들도 의사였다. 자본주의의 하수구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해서 자격증들을 땄다. 마침내 그녀는 구청 민원실에서 일하는 계약직 공무원이 됐다. 어느 날 민원창구에 앉아 있는 그녀의 말투를 듣고 어떤 사람이 말했다.
“당신 북한 사람이지? 사기꾼.”
“왜 사기꾼이라고 하십니까? 선생님이 북한 사람들한테 어떤 피해를 보셨죠?”
화가 났다. 어딜 가도 말투 때문에 무시당했다. 서울말은 흉내 내기가 힘들었다. 북한 사람들의 어조와 비슷한 대구 사투리를 배우기 위해 볼펜을 입에 물고 연습을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너 바보지?”
민원인이 다시 그녀를 놀렸다. 그 민원인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동그랗게 말아서 그녀의 이마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공무원은 친절해야 하는 거야. 사과해.”
탈북민 모녀는 냉동고 같은 사회의 냉기 속에서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도 삶이 힘들었다. 아이도 속칭 ‘왕따’를 당했다. 점심시간 못된 아이들이 밥을 먹는 딸아이에게 자기들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매라고 했다. 그녀의 딸은 밥을 먹다 말고 가서 무릎을 꿇고 아이들의 운동화 끈을 매주었다. 못된 아이들은 그녀 딸 아이의 이마를 숟가락으로 때렸다.
그녀의 딸은 학교에서 주는 우유를 같이 먹지 못했다. 급식비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일당을 벌면 동네 편의점에서 우유 한 팩을 사서 딸아이의 가방에 넣어주었다. 어느 날 엄마는 딸아이의 가방이 온통 우유로 범벅이 된 걸 봤다. 학교에서 하얀 우유를 아이들에게 줄 때였다. 그녀의 딸이 가방에서 초코우유를 꺼내자 선생은 그걸 보고 화를 냈다. 다른 아이들은 다 흰 우유를 먹는데 너 혼자만 초코우유를 먹으면 안 된다고 도로 집어넣으라고 했다.
아이는 당황해서 뜯었던 우유를 그대로 가방 속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가방이 엉망이 된 것이다. 다른 아이들의 학대와 선생의 차별을 견디다 못한 아이는 어느 날 면도칼로 손목을 그었다. 얼마 전 그녀가 일하는 구청 뒤의 커피점에서 점심시간에 잠깐 만나 들은 이야기였다. 그녀는 왜 남쪽으로 왔을까. 진정 여기서 살고 싶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물었다.
“지금 다시 사는 곳을 결정하라면 남과 북 어디죠?”
“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남들은 자유를 얻었다고 하는데 무슨 자유를 얻었는지 모르겠어요. 굶어 죽을 자유, 북에 있는 가족을 못 보는 것도 자유인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이 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것 같았다. 좀 잘 살게 됐다고 가난한 이웃을 무시해도 될까. 우리는 어땠던가. 입에 밥을 넣기 위해 딸들이 식모로 팔려갔었다. 여성들의 머리를 잘라 가발을 만들어 팔았다. 간호사들을 독일로 보내 시신을 만지게 하고 광부들을 외국의 탄광 막장으로 내려 보냈다. 아들들을 월남전에 보내 피 값을 받았고 심지어 기생관광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이기도 했다.
그런 수치와 고통을 겪었다면 북한 주민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발로 살겠다고 이 땅을 찾아온 탈북민들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건 따뜻한 사회가 아니다. 통일을 얘기하고 있다. 사랑이 말라버린 이 사회를 과연 북한 주민들이 선택할까.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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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