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늦은 연구, 통화주권 지키기 위한 선택…관련 시장 급성장 위해 ‘불확실성’ 해소 과제
지난 7월 21일 조달청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발주한 CBDC 모의실험 연구용역 입찰에서 카카오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라운드X는 총점 95.3754점으로 네이버 라인플러스(92.7182점)와 SK C&C(89.8163점)를 제쳤다. 8월부터 본격적인 연구에 나설 계획으로, 기간은 착수일로부터 10개월 이내다. 사업 예산은 최대 49억 6000만 원이다.
CBDC의 기반이 될 기술은 그라운드X의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이다. 카카오뱅크와 카카오페이를 비롯해 미국 블록체인 기술기업 컨센시스, 삼성SDS 자회사 에스코어, 컨설팅기업 KPMG, 블록체인 스타트업 온더, 핀테크기업 코나아이 등 여러 협력사가 연구에 참여한다. 크게 2단계로 진행하는데 먼저 IT시스템을 구축하고 △CBDC 제조·발행·환수 △참가기관·이용자 전자지갑 관리 △송금·대금결제 등 기본 기능 구현, 정상 작동 여부 점검 등을 수행한다. 이후 해외 송금 및 대체불가능한토큰(NFT)과 같은 디지털 자산 구매, 오프라인 결제 등 CBDC 기능을 확장하고 개인정보 보호 등을 테스트한다.
한 가상자산(암호화폐) 거래소 관계자는 “아직 일상에 적용 가능한 서비스는 내놓은 바 없어 증명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 “이번 사업에서 블록체인 시장이 유의미하고 업계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산업 발전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봤다. 클레이튼 운영을 주도하는 거버넌스카운슬(GC)에는 카카오, LG전자, 넷마블, 위메이드, 안랩, GS샵, 셀트리온, 신한은행 등 분야별 기업 30여 개가 참여해있다. 그러나 이들과 연계한 혁신 서비스가 눈에 안 띄고 클레이튼을 활용한 탈세 정황이 드러나 국세청이 조사하는 등 잡음이 있었던 만큼 이를 계기로 그간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CBDC가 뭐길래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 화폐다. 현금 이용 감소와 민간 디지털 화폐 출현, 코로나19 등에 대응해 여러 국가가 논의 중이다. 한은은 2019년 초 지급결제 조사연구에서 CBDC 발행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밝혔으나, 중국을 시작으로 일본, 유럽, 미국 등이 연구와 도입에 박차를 가하자 방향을 틀었다.
금융 디지털화 시대 통화주권 확보를 위해서라도 CBDC 도입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타국의 디지털 통화가 유입되면 자국 통화의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 유입되는 관광객 등이 우리나라 돈으로 환전하지 않고 디지털 위안화나 유로화 등 해외 원화를 쓸 수 있다. 국내에서 타국이 발행한 화폐 비중이 커지면 금융당국은 통화정책을 주체적으로 운영하기가 어려워진다. 각국이 방어 차원에서 CBDC를 접근하는 이유다.
중국은 무역 상대국을 자국 통화권에 들어오도록 함으로써 미국 기축통화 체제를 무너뜨리고자 CBDC 도입을 어떤 국가보다도 빨리 검토했다는 의견이 많다. 미국은 9월 연방준비제도(Fed)를 통해 CBDC 연구보고서를 공개하는 등 대응하고 있다. 양국 통화 패권전쟁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내 CBDC 도입이 시급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CBDC는 스테이블코인(실제 화폐와 연동된 암호화폐) ‘리브라’를 만들겠다는 페이스북 행보에 여러 금융당국이 제동을 건 것처럼 디지털 결제 시장에서 민간 사업자의 독점을 견제하는 수단도 될 수 있다. 금융산업이 성장하지 못한 국가에서는 국민의 금융 접근성 향상에 기여하고, 불법 거래 추적과 자금세탁 방지에도 요긴하다. 재난지원금 등 통화정책이 필요한 경우에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위정현 중앙대 교수는 “금융 보수성이 강한 일본도 CBDC 연구를 진행 중이고, 중국은 시범사업을 넘어 소도시 중심으로 실험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늦었다”며 “중국이 달러 영향권에 놓인 한국을 끌어내려고 움직일 수 있다. 경제주권 무력화를 막으려면 디지털 원화 상용화는 물론 민간 발행 가상화폐와 호환되도록 서둘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부작용도 있다. 중앙은행이 거래정보를 보유하고 있어 개인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여지가 있는 데다 중앙은행의 역할이 집중돼 금융기관 입지가 약해질 수도 있다. 아현동 KT 화재 당시 주변 일대 카드 사용이 불가했던 사례처럼, 외부 해킹으로 갑자기 시스템이 다운돼 CBDC를 사용할 수 없는 등 위기도 발생 가능하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CBDC를 대형 결제 건에서만 도입한다거나 다중 관리시스템을 마련해 한 시스템이 마비돼도 다른 것으로 보완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인프라와 안전장치를 갖출 필요성이 언급된다.
CBDC 연구로 금융업계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다거나 관련 시장이 급성장할 것이란 기대감은 크지 않은 분위기다. 워낙 디지털 자산에 대한 각 금융당국 입장이 달라 미래 예측이 어렵고, 우리나라는 관련 규제 등 법적 체계도 부재한 까닭이다. IT업계 한 관계자는 “결과가 긍정적이라면 민간 디지털 자산 시장을 투기로 여기는 금융당국 인식이 바뀌지 않겠느냐”며 “블록체인 업체들의 투자 유치도 용이해져 기술 개발과 글로벌 진출을 통해 성장해나갈 수 있다”고 전했다.
암호화폐는 배척하면서 CBDC는 검토하는 한은의 이중적 태도에 따가운 시선도 뒤따른다. CBDC가 발행되더라도 이미 커버린 암호화폐 시장은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암호화폐를 규정하는 기본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그 안에서 기술 경쟁과 투자 유치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화인 블록체인 에반젤리스트는 “금융디지털화에 암호화폐도 빠질 수 없는데 CBDC만 검토하는 건 전체 흐름상 균형 잡힌 시각이 아니다”며 “코인은 수익을 노리는 투자 수단만이 아니라 스타트업들이 투자 유치를 위해 만든 것이기도 하다. STO(증권형 토큰공개) 등 주식 시장의 기준을 암호화폐 시장에 적용하면 산업 성장을 막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STO는 암호화폐 발행사에 대한 지분 소유권으로 주식과 같은 개념이다.
보다 많은 업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CBDC 본사업이나 관련 프로젝트 시행 시 이들에 혜택이 몰릴 수 있고, 여러 플레이어가 시험을 통해 경쟁해야 기술력 있는 기업이 발굴될 수 있다는 것. 위정현 교수는 “제한된 수의 참여자로는 가상자산 생태계를 구성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시험단계에서는 많은 기업이 들어와 서로 다른 기술로 테스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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