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방송국의 책 프로그램에선 아예 ‘고전의 반격’이라는 코너까지 있다. 거기 초대 손님으로 나와 달라는데, 그 날의 고전은 <지와 사랑>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책이다. 나는 감각의 길을 통해 세계를 배우는 골드문트를 사랑하고, 지성의 길을 통해 세계를 배우는 나르치스도 사랑한다. 그들은 서로의 거울이고, 그림자고 그럼으로써 서로의 구원이 되었다.
내가 <지와 사랑>을 처음으로 접한 건 여고시절이었다. 그 시절 내게 충격적이었던 몇 작품이 있는데, 그것이 헤세의 <지와 사랑>이었고, 카뮈의 <이방인>이었고, 루소의 <후회록>이었으며, 톨스토이의 <참회록>이었다. 그 책들은 정직하고 유능한 나라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학교교육의 저편에 있었다.
생각해 보라. <지와 사랑>의 골드문트라는 인물을. 그 때 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복창하게 한 교육의 관점에서 골드문트는 공부하라고 학교에 보내놓으니 공부는 하지 않고 여자 뒤꽁무니나 쫓다가 가출하고, 평생 ‘정착’이라는 것을 모르고 산 인물이다. 착한 교육에 길들여진 여고생이 그가 바로 덧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덧없는 것들 속에서 영원을 배우고 있는 사랑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또 생각해보라. <이방인>의 뫼르소를. 엄마가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황폐한 남자, 그 남자는 햇볕이 뜨겁다는 이유 아닌 이유로 사람까지 살해했다. 그때 뫼르소에 대한 내 느낌은 파렴치한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 나는 계몽주의 사상가고 교육론의 대가(大家)라고 교과서에 나오는 루소가 자기 아이들은 모두 고아원에 버린 무책임한 아버지라는 사실에 질렸고, 하나님을 믿는 톨스토이의 내면에 그렇게 복잡한 탕아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세상은 요지경이었고 인간들은 이상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충격적으로 읽은 책들이 잊혀지지 않고 문득문득 기억이 난다는 거였다. 그 책들은 내 가까이에서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내 인생의 무거운 날들, 망연했던 날들의 비타민이었다. 서른 즈음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헤세였고, 톨스토이였다. 어느덧 까뮈를 본능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나를 보고 내 자신이 놀라기도 했다.
이제 나는 안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생의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존재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일 것이다. 나보다도 먼저 융이 고백했다. 그 자신은 선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온전한 사람은 자신의 열정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자신의 상처와 대화하는 사람이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