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격 영향 적은 종목 특성, 아낌 없는 협회 지원, 남다른 실전 훈련…이번에도 금 금 금
#확실한 효자종목
양궁은 우리나라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확실한 효자종목으로 꼽힌다. 양궁은 1984 LA 올림픽 서향순의 금메달을 시작으로 역대 올림픽에서 42개의 메달(금 26, 은 9, 동 7)을 따냈다.
다수 메달이 걸린 다른 종목과 달리 그간 양궁에서 획득할 수 있는 금메달은 4개였다. 이번 대회에서 혼성 단체전이 신설되며 5개가 됐다. 이번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그동안 효자종목으로 꼽아온 레슬링은 18개, 유도 15개, 태권도는 8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이들과 비교하면 양궁에 걸린 금메달 수가 훨씬 적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따낸 종목이다. 국기인 태권도를 포함해 유도, 레슬링 종목에서 각각 10개를 갓 넘기는 금메달을 따낸 가운데 양궁만 20개가 넘는 금메달을 보유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양궁 대표팀의 선전은 높은 성적을 기대했던 종목들이 이에 미치지 못하면서 더욱 돋보이고 있다. 대회 개막 2일차였던 지난 24일은 다수 메달 획득이 유력해 보여 '골든데이'로 불렸지만 남자 태권도 58kg급 세계랭킹 1위 장준, 남자 펜싱 사브르 세계랭킹 1위 오상욱 등 세계 최강자들이 목표로 하던 금메달을 놓치며 이변의 희생양이 됐다. 우리나라 역대 올림픽 최다 메달 기록을 노리던 '사격의 신' 진종오도 끝내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이날 양궁 혼성 단체전에서 우리나라 선수단의 첫 금메달이 탄생했다. 이번 대회에서 신설된 생소한 종목이었지만 우리나라 선수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개인 랭킹전에서 각각 1위에 올라 혼성 단체전에 대표로 나선 김제덕과 안산은 차분한 경기 운영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막내들의 반란
김제덕과 안산의 혼성 단체전 금메달은 이번 대회 우리나라의 첫 금메달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2004년생(김제덕)과 2001년생(안산)인 이들은 남녀 양궁 선수단에서 막내다.
당초 팀 내 기대감을 높인 선수는 남자팀의 김우진, 여자팀의 강채영이었다. 이들은 각각 세계랭킹 1위에 올라 있으며 '올림픽보다 어렵다'는 국가대표 선발전도 1위로 통과했다.
하지만 지난 23일 열린 남녀 양궁 개인 예선 랭킹 라운드에서 1위에 오른 이들은 김제덕과 안산이었다. 이들은 한국 선수단 내 1위뿐 아니라 경쟁국가 선수들을 모두 제친 전체 1위였다. 양궁 대표팀은 감각이 좋은 이들을 혼성 단체전에 출전시켰고 최상의 결과를 냈다.
시상대에서 보여준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19 문제로 수상자가 직접 메달을 스스로 목에 걸어야 한다. 하지만 김제덕과 안산은 서로 파트너에게 금메달을 걸어주는 모습을 연출해 보는 이들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명장면은 멕시코와의 4강에서 나왔다. 세트 포인트 1-1로 팽팽한 승부를 이어가던 2세트, 김제덕과 안산은 계속해서 10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발을 남겨둔 상황에서 안산은 앞서 10점에 꽂혀 있던 화살 뒷부분을 맞혔다. '화살 위에 또 화살을 맞혀 쪼개버렸다'는 전설 속의 인물 로빈 후드의 이야기를 실현시킨 것이다. 과녁이 아닌 화살에 먼저 닿으며 10점이 아닌 9점이 됐지만 안산은 밝은 미소를 지었고 이를 지켜보던 김제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김제덕은 그간 양궁 경기에서 보기 힘들었던 '파이팅'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팀 동료 안산에게 힘을 불어넣기라도 하듯 목이 터져라 '파이팅'을 외쳐댔다. 이어진 남녀 단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튿날 열린 여자 단체전에서 여자팀이 금메달을 따내 시상대에 오르자 김제덕의 '코리아 파이팅'이라는 관중석에서 시작된 외침이 중계 마이크로 전달될 정도였다. 자신이 직접 참가한 남자 단체전에서도 연신 파이팅을 외쳐댔다. 차분하게 진행되는 양궁 경기만 봐왔던 시청자들에겐 생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아는 이들에겐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장면이었다. 김제덕과 청소년 국가대표, 성인 국가대표 후보를 함께하며 친분을 나눈 고교생 양궁 선수 김나리는 "개인전은 그런 장면이 드물지만 국내 대회에서도 단체전이 열릴 때면 너도나도 그렇게 파이팅을 외친다. (김)제덕이도 마찬가지다. 처음 보는 모습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런 모습은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방법으로도 풀이됐다. 김나리는 "올림픽이 워낙 큰 무대고 처음 경험하는 자리다. 제덕이가 긴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 긴장을 풀려고 더 활기차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이어진 금메달 릴레이
양궁 대표팀은 이후 이틀간 이어진 남녀 단체전 결승에서도 맡겨놓은 금메달을 찾아오듯 승전보를 올렸다. 먼저 시상대 최상단을 차지한 여자팀은 16강 없이 8강부터 대회를 시작했다. 앞서 열린 개인 랭킹라운드에서 안산, 장민희, 강채영이 각각 1, 2, 3위를 휩쓸며 톱시드를 배정받아 8강으로 직행한 것이다.
8강부터 나선 여자팀에 거칠 것은 없었다. 이탈리아, 벨라루스,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선수단을 각각 물리치며 올림픽 9연패를 달성했다. 이는 미국 남자 혼계영 400m, 케냐 남자 육상 3000m 장애물 경기에서만 나온 대기록이다. '드림팀'이 나서는 미국 남자 농구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다.
이들은 8강, 4강, 결승을 거치는 과정에서 세트 포인트 단 1점만 내주는 강력함을 자랑했다. 9세트에서 한 번의 동점만 나왔을 뿐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튿날 남자팀도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했다. 남자팀도 랭킹라운드에서 김제덕, 오진혁, 김우진이 1, 3, 4위를 차지해 16강을 건너뛰고 8강부터 경기를 시작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선보인 여자팀과 달리 남자팀은 4강에서 성사된 한일전에서 고비를 맞았다. 세트를 주고받으며 세트 포인트 4-4로 동률을 이뤘고 슛오프로 들어갔다.
슛오프에서도 한일 양국은 각각 28점으로 치열한 승부를 이어갔다. 결국 점수상 동점이었지만 한국 선수들의 화살이 좀 더 과녁 중심에 가깝게 위치해 결승에 진출했다. 어렵게 진출한 결승에서는 대만을 상대로 6-0 완승을 거뒀다. 마지막 한 발을 쏜 직후 화살이 과녁에 닿기도 전에 오진혁이 외친 "끝"이라는 외마디는 지켜보던 시청자들을 통쾌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최강이 되었나
도쿄올림픽 공식 홈페이지에서 대한민국은 '올림픽 양궁 최강국'으로 소개된다. 세계 양궁이 상향평준화되고 있다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양궁 강국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2016 리우올림픽에서 4개의 금메달을 모두 휩쓴 데 이어 이번 대회 역시 성공적으로 치르고 있다. 여자팀에 비해 고전해왔던 남자팀마저 두 대회 연속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한다. 우리나라는 왜, 어떻게, 유독 양궁 종목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지. '양궁 강국'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국기인 태권도가 이번 대회에서 '노골드'에 그친 것을 떠올리면, 상향평준화된 이 시대에 아무리 강국이라고 해도 수십 년 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는 매우 어렵다.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양궁에서 극강의 모습을 보이는 원동력 중 하나로 '종목의 특성'을 꼽는다. 양궁은 개인 종목이자 신체 접촉이 없는 종목이다. 비교적 운동 능력이나 체격적 요인의 영향이 적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선수가 유리할 수 있는 일부 종목과 달리 양궁은 체격이 작아도 충분히 승부에서 앞설 수 있다.
또 양궁은 판정에 대한 변수가 적은 종목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을 갖췄더라도 변수 때문에 좌절을 겪을 수 있는 것이 스포츠다. 하지만 양궁은 점수 집계 과정에서 혼돈이 극히 적다. 과녁에 꽂힌 화살의 위치를 보고 점수를 매기기 때문이다. 심판 판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드물다. 대한민국 여자 양궁 국가대표팀과 마찬가지로 올림픽 9연패를 달성한 미국 수영, 케냐 육상 역시 심판의 판정이 아닌 결승선을 빨리 통과하는 것으로 승부가 결정된다. 격투기, 구기 종목 등에 비해 의외의 결과가 나올 확률이 적다.
대한양궁협회의 존재도 우리나라의 양궁 강국 도약 요인으로 꼽힌다. 1983년 대한궁도협회에서 분리된 양궁협회는 국내 각 종목 단체 중에서도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단체로 평가받는다.
양궁협회는 다른 종목에 비해 재정적 어려움이 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초대 회장을 지낸 이후 1985년부터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현대차그룹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2005년부터 정의선 회장이 15년 넘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후원을 하는 만큼 비교적 넉넉한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2016 리우올림픽 당시에는 대회 현장에 양궁 선수단을 위한 휴식 전용 트레일러를 지원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양궁 국가대표의 독특한 훈련도 '강국 유지'의 힘이다. 많은 관중이 들어차는 올림픽 등 대규모 대회의 특성을 대비한 훈련을 해왔는데, 양궁 대표팀은 훈련장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해 소음 속에서 훈련을 진행하는 등 노력을 해왔다. 종종 야구장에서도 훈련을 했고 LG 트윈스, 키움 히어로즈 등 야구단의 협조가 이어졌다. ‘일찍 야구장에 도착해서 양궁 대표팀 훈련을 도와 달라’는 구단의 요청에 야구팬들은 기꺼이 함성과 호루라기 등으로 화답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다만 이번 도쿄올림픽은 코로나19 여파로 무관중 대회가 치러지고 있다. 양궁 대표팀은 ‘소음 훈련’을 대거 생략하고 진천선수촌 훈련장을 올림픽 양궁장과 흡사한 모습으로 꾸며 훈련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무관중 경기에 대비, 빈 좌석까지 깔아 놓는 철저함을 보이기도 했다. 선수들은 일본어 안내방송에 맞춰 훈련장에 들어서기도 했다.
양궁협회는 학생 선수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대표, 국가대표 후보팀 등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종목이 청소년 대회 등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이 같은 상비군을 운영하는 반면 양궁협회는 선수 육성에 초점을 맞춘다. 최근 코로나19 영향으로 합숙 훈련을 진행하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비대면으로 강의 등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에 그치지 않고, 전직 메달리스트들의 특강으로 선수들에게 승부욕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어린 선수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영어회화 수업도 진행한다. 국가대표 후보팀을 경험한 선수들은 “다녀오면 확실히 기량이 향상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량이 좋은 선수들끼리 모이기에 경쟁심도 생긴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훈련 지원을 잘 받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심지어 '양궁은 초등학생도 장비 지원을 받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한 학생 선수는 "사실에 가깝다"고 증언했다. 그는 "양궁 선수를 시작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활이나 화살 등 장비에 사비를 지출한 적이 없다. 다른 학교 그 어느 선수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장비를 직접 샀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 모든 선수들에게 장비와 식비 정도는 지원이 나온다.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아마추어 종목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규모 대회도 정기적으로 치르고 있다. 정몽구 명예회장의 이름을 딴 현대자동차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는 1위 상금 1억 원일 정도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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