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화이트 감독의 다큐영화 ‘암살자들’ 화제…촬영중 FBI 컨설팅 받는 등 혹독한 마음고생
명백한 범행 증거를 앞에 두고도 두 여성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몰래카메라 촬영을 위한 섭외’에 응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살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유죄가 확정되는 듯했지만 사건 발생 2년여가 흐른 2019년 두 사람은 차례로 석방됐다. 촬영이라는 말에 속아 몰래카메라 영상 출연 제안에 응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이미 5년이 지났지만 대중의 뇌리에 각인돼 잊히지 않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가 관객을 찾는다. 미국 감독의 시선으로 3년여 동안 사건의 진위를 파헤친 영화 ‘암살자들’이다. 시도 자체가 북한의 ‘역린’을 건드리는 행위인 만큼 제작진은 촬영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혹시 모를 북한의 공격에 대비해 FBI로부터 컨설팅까지 받았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고 작품을 내놓은 지금, 제작진은 “북한과 관련 영화는 앞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몰래카메라 고용’ 주장 의문에서 출발
‘암살자들’은 김정남 피살사건을 다루는 첫 번째 영화로 주목받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만들어온 라이언 화이트 감독은 2017년 초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막 취임했을 당시 일어난 김정남의 암살사건이 자국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용의자인 두 여성이 “북한에 속았다”는 주장을 내놓자 진실에 더 큰 의문에 생겼다.
피살 용의자로 체포된 여성은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이다. 손에 화학 독극물인 VX 신경작용제를 묻히고 공항에 대기 중이던 김정남에게 다가가 얼굴에 감싸 살해했다. 의문을 증폭시키는 대목은 그 이후부터다. 두 여성은 경찰 조사에서 몰래카메라 영상 촬영에 필요한 배우로 캐스팅된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2016년 12월경 ‘북한의 영화제작자’라고 소개한 사람들로부터 출연 제안을 받아 응했다는 설명이다. 이들을 속인 북한 관계자들은 범행 당일 쿠알라룸푸르 공항으로 출국하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감독은 2017년 촬영에 돌입한 두 여성의 재판이 끝난 2019년까지 매달 한 번씩 미국에서 말레이시아를 찾아 재판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들의 변호사와 친구들, 가족을 만나 인터뷰도 했다. 그 과정을 통해 감독은 시티 아이샤와 도안 티 흐엉이 “북한에 의해 고용된 ‘장기판의 말’”이라고 결론 내렸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최근 온라인으로 기자회견을 가진 라이언 화이트 감독은 촬영을 시작한 이후 두 여성이 “무죄”임을 믿게 됐다고 했다. 여러 증거를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변호사로부터 전달받은 휴대전화 메시지와 왓츠앱, 페이스북을 통해 이뤄진 북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직접 봤다”며 “몰래카메라 촬영으로 믿게 만드는 과정이 여러 증거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재판과정에서도 두 여성이 김정남의 암살 계획을 사전에 알았는지 여부를 입증할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암살자들’은 사건 당시를 생생하게 담아낸다. 두 여성이 공항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는 모습부터 사건 이후 김정남이 공항의 직원을 붙잡고 몸 상태를 설명하는 장면, 여성들이 손을 씻으러 화장실을 찾아가는 모습 등이다. 감독이 촬영 과정에서 익명의 취재원으로부터 전달받은 1000시간에 달하는 CCTV를 확보해 치밀하게 분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정은도 이 영화 존재 알고 있을 것”
‘암살자들’은 2020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극영화든, 다큐멘터리든 미국에서는 북한을 다루는 작품이 워낙 드물기 때문에 그 시도 자체로 주목받았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 역시 녹록지 않았다. 라이언 화이트 감독은 “북한의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고 했지만 촬영 내내 제작진의 휴대전화와 노트북 등 전자 기기에 대해서는 바짝 신경을 쓰면서 조심했다. 혹시 모를 사이버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런 걱정은 괜한 노파심이 아니다. 2014년 미국 소니픽쳐스가 북한을 풍자한 영화 ‘디 인터뷰’를 내놓은 이후 전방위에서 벌어진 공격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인기 코미디 배우 세스 로건과 제임스 플랭코가 주연한 ‘디 인터뷰’는 미국 유명 토크쇼 사회자가 북한에 잠입해 김정은 암살 작전을 실행하는 과정을 다뤘다. 개봉 준비 과정에서 소니픽쳐스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해킹 공격을 당했고, 주연 배우들은 테러 위협까지 받았다.
이를 의식할 수밖에 없던 라이언 화이트 감독은 “소니픽쳐스의 해킹 사건을 담당한 FBI 팀에 우리 제작진에 대한 컨설팅을 요청했다”며 “촬영하는 동안 두 다리를 뻗고 자지 못할 만큼 늘 불편함을 감수했다”고 밝혔다. 배급사를 찾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트럼프 정권 초중반은 북한과의 관계에 변화를 시도하던 때였던 만큼 제약이 따랐다. 작품을 세상에 공개할 기회는 영화제에서 찾았다. 선댄스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이후 제16회 취리히 영화제, 제36회 바르샤바 국제영화제, 제31회 스톡홀름영화제 등에서 공개돼 관심을 받았다.
라이언 화이트 감독은 특히 한국 관객에게 ‘암살자들’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의 주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질 국가는 한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은 “북한에서도 영화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김정남 암살을 국제공항에서 벌인 이유가 “전 세계에 공포와 위협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김정은의 행적을 보면 (‘암살자들’의 존재를) 알 것이고,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혹독한 마음고생을 겪어서일까. 그는 앞으론 북한 관련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궁금한 이야기는 남아있다. 바로 김정남 암살 이후 사라진 그의 아들에 대한 행방이다. 감독은 “누군가 후속 작품을 만든다면 김정남 암살 후 그의 장남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용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해리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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