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보통 사람들의 밤’ 행사서 소주·김밥·순대 내놔…노무현 와인잔에 포도주스 따르고 건배
술 하면 빠질 수 없는 역대 대통령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은 소문난 애주가이자 주당으로 알려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육군 1군 참모장이던 당시 한 기자와 중식당에서 누가 술이 센지를 놓고 대결하다가 ‘배갈’ 24병을 비웠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박정희 대통령을 대표하는 술은 막걸리다. 월간조선 1985년 4월호 ‘박정희 대통령과 술’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박진환 전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은 박 전 대통령의 막걸리 사랑을 이렇게 기억했다.
“오후 5시쯤 되면 대통령이 우리한테 전화를 했다. ‘보좌관들 다 있어? 식사 같이 해’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6시에 식당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막걸리가 너무 지겹게 나와서 오늘도 또 막걸린가 하고, 조금 먼저 가서 식당에 목을 쏙 내밀고 살피곤 했다. 그때 막걸리 통이 있으면 아주 질색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새마을운동 현장 시찰 때 막걸리와 새참상을 따로 준비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에게 막걸리는 술 이상의 의미였다. ‘서민 대통령’ 이미지를 얻기 위한 매개체였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했던 박 전 대통령은 막걸리를 통해 국민들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술을 활용했던 셈이다.
시대상을 엿볼 수도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막걸리에 맥주를 타서 마시는 ‘맥탁’을 즐겨 마셨는데, 이는 ‘쌀 금지령’이 풀린 뒤 생긴 습관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 쌀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분식을 장려했고, 밀에 입맛이 길들여진 뒤엔 쌀로 빚은 막걸리가 심심하게 느껴진 탓이다. 박 전 대통령은 막걸리 맛이 예전과 같지 않다며 맥주나 사이다를 타서 마셨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막걸리가 일종의 속임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박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술은 ‘시바스리갈 12년산’이다. 지금은 대중적인 양주지만, 1988년 양주 수입 자율화가 되기 전엔 사회 고위층만 마시는 고급술이었다.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지인들을 청와대로 부르거나 TV 화면 밖에선 시바스리갈을 즐겼다. 10·26 사태 당시 총탄에 삶을 마감할 때도 시바스리갈과 함께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술과 관련된 일화들이 넘친다.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평소 덕망 있는 선비였던 이승국을 감찰위원 물망에 올려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친척이기까지 한 이승국 대신 정인보를 택했다. 그 이유가 술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애주가였던 이승국을 경무대(청와대 전신)로 초청해 술로 테스트를 했는데, 이승국이 인사불성이 되는 모습을 보고 정부 요직에 앉힐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초대 사회부 장관이었던 전진환 전 장관은 임명 4개월 만에 사임했는데, 술 때문으로 알려졌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전 전 장관은 술 냄새를 풍기며 국무회의에 들어오기도 했는데, 이 전 대통령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비서인 박용만을 통해 전 전 장관에게 주의를 줬지만, 전 전 장관은 당시 “아침에 막걸리를 몇 잔 안 하면 종일 기분이 나지를 않아. 그저 몇 잔 해야 기분도 상쾌하고 일도 잘된단 말이야. 막걸리를 못 먹게 하면 나 장관 노릇 못 해 먹겠어”라고 답했다고 한다.
술과 함께 빠질 수 없는 건 음식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행사였던 ‘보통 사람들의 밤’에서 소주, 막걸리와 함께 ‘서민 음식’인 김밥, 순대, 어묵 등을 내놓았다. 당시 행사엔 버스 운전기사와 안내원, 전화교환원, 지체장애인, 소년소녀가장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각하’라는 호칭을 사양하며 자신을 만화나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도 좋다고 말해 호응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주량이 포도주 반병 정도로 술을 즐기지 않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음식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칼국수를 청와대 점심 메뉴로 바꿨다. 단 한 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는 공표 뒤였다. 그것은 절약과 개혁을 암시하는 상징이었다. 김 대통령은 취임 2주년에 가진 한 간담회에서 청와대의 음식이 왜 칼국수인지를 묻는 말에 ‘서민적인 음식’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김영삼 정부 청와대 요리사였던 이근배 씨는 “김영삼 대통령께서 면을 좋아하셨지만 3~4년 동안 계속 면을 드실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퇴임하고 봉하마을에 내려간 뒤엔 막걸리를 박스째로 사두고 매일 한 병씩 비울 정도의 애주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술을 멀리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해외 귀빈이 참석한 청와대 만찬 등에서 와인잔에 포도주스 따라 건배를 했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절주한 셈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술을 못하시느냐는 내 질문에 ‘대통령은 24시간 위기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술 마시고 판단력을 잃으면 곤란하지요’라고 답했다. 퇴임하시곤 봉하에서 함께 책 쓸 때 세미나 전에 점심시간에도 대통령과 약주 한잔하는 재미가 쏠쏠했죠. 그렇게 약주를 즐겨하셨으면서 청와대 5년을 어찌 참으셨는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술에 엄격했다. 이 전 대통령은 포항중학교 시절 어려운 환경 탓에 끼니를 술 찌꺼기(지게미)로 때우곤 했다고 한다. 교실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흐느적거리던 그에게 담임교사가 호통을 쳤고, 그 이후로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기로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 대통령은 재임 시기 학교·음주 폭력, 불법사금융 단속 공무원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것에 대해 관대한 문화가 있는데 이런 술 문화도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대건설 사장을 역임할 때도 부하 직원들에게 공적인 자리 외엔 술을 즐기지 말고, 먹더라도 만취는 금지라는 지침 아닌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해 유권자가 건네는 소주 3잔을 먹고 “머리가 띵하고 몸을 가누기 힘든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론 가급적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대통령이 보내는 명절 선물에 때론 술이 포함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설 명절 선물 세트에 경남 김해 봉하마을 떡국 떡, 강원 양양 한과 등 지역 특산물과 함께 전북 전주의 이강주를 택했다.
전통주를 명절 선물 세트에 처음 포함시킨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3년 추석에 지리산 복분자술을, 2004년 충남 한산 소곡주, 2005년 추석엔 평안도 지방 소주인 문배주,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추석 선물로는 전주 이강주를 선물했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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