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출신 전임자와 다른 노선 걷을지 관심…머지포인트 사태 수습이 첫 시험대
#문재인 정부, 첫 관료 출신 금감원장
지난 8월 6일 정은보 신임 금감원장이 취임했다. 행시 28회로 공직에 입직해 재정경제부 경제분석과장, 금융위 금융정책과장,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정책관(국장급)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19년 9월부터는 한미방위비분담 협상대표로서 미국과 한미방위비분담협상을 도맡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관료 출신 금감원장이다. 지난 5월 7일 윤석헌 전 원장이 임기 만료로 물러난 이후 금감원장 자리는 3개월간 공석이었다. 1999년 금감원 출범 이래 가장 긴 공백이다. 그만큼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동안 청와대는 민간 출신 학자를 계속 물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정통 관료 출신을 앉혔다.
앞서 2018년 최흥식 전 원장, 김기식 전 원장 등 민간 출신 원장들이 각각 채용비리와 도덕성 문제로 연이어 조기 사임했지만, 청와대는 ‘금융개혁’을 강조하며 교수 출신 윤석헌 전 원장의 임명을 단행했다. 역대 금감원장 총 13명 중 10명이 관료 출신인데, 나머지 민간 출신 3명(11대~13대)이 문재인 정부에서 채워진 것이다. 금감원장은 금융위원장이 임명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정은보 원장은 취임사에서 “금융감독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재정립하겠다. 법과 원칙에 기반한 금융감독에 주력하겠다”며 “사후적인 제재에만 의존해서는 금융권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결국 소비자 보호도 취약해질 수 있다. 금융감독의 본분은 규제가 아닌 지원에 있다는 점을 늘 새겨달라”고 강조했다. 그간 금융사와 금융사 최고경영자(CEO) 징계 국면에서 강성 기조를 유지한 윤석헌 전 원장과 다른 노선을 밟겠다는 의지로 보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은보 원장은 취임 이후 빠르게 조직 쇄신에 나섰다. 8월 10일 정은보 원장은 부원장(4명), 부원장보(10명) 등 임원 14명에게 일괄사표를 요구했다. 조직 변화의 신호탄을 쏜 셈이다. 일부 임원들은 “정권 말 무리한 인력 교체”라며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윤석헌 전 원장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고 지적한다. 금융개혁의 후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경제개혁연대, 경제민주주의21, 경실련, 금융정의연대, 민변 민생경제위, 한국YMCA전국연맹 등 6개 시민사회단체는 “금융감독기구의 자율성 확보를 위해 금융위와 견해 차이를 보이고 사모펀드 사태의 처리 과정에서 금융기관에 대한 엄정한 제재와 금융소비자 피해 구제를 강조했던 윤석헌 전 원장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것”이라며 “금융감독과 금융소비자 보호 후퇴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풀어야 할 현안 산적
신임 금감원장이 풀어야 하는 숙제는 차고 넘친다. 우선 금융위원회와의 관계 설정이다. 전임 원장 시절, 금감원과 금융위는 엇박자를 내는 일이 빈번했다. 정 원장과 함께 취임한 고승범 신임 금융위원장은 행시 28회 동기이자, 정 원장과 함께 금융위 요직을 맡으며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다. 일단 시작은 ‘장밋빛’이다. 8월 6일 첫 출근 때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금융위와 금감원은 한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정 원장과 통화했다. 한국은행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은 소통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사모펀드 사태의 수습도 정 원장의 몫으로 남겨졌다. 지난 7월 감사원은 디스커버리, 라임, 옵티머스 등 사모펀드 대규모 환매 중지 사태의 책임이 금감원에도 있다며 임직원들 징계를 요구했다. 징계를 받은 금감원 직원들은 재심을 청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는 8월 27일에는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로 중징계를 받은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징계를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 대한 판결이 나온다. 우리금융이 승소한다면 금감원의 CEO 제재 근거가 흔들리게 된다. 앞서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는 사모펀드 사태 관련해서 금융사 CEO들에게 줄줄이 중징계를 내렸다. 금융위는 이번 선고 결과를 보고 최종 제재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취임과 동시에 선불업이라는 새로운 과제까지 생겼다. 지난 8월 16일 정은보 원장은 머지플러스 상황을 점검하는 대책회의를 개최하고 고객들이 겪고 있는 불편과 시장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금감원은 선불업 상황부터 파악 및 점검할 예정이다. 올해 3월 말 기준으로 등록된 선불업자는 65개사이고, 발행 잔액은 2조 4000억 원에 달한다. 앞서 할인 결제 모바일 플랫폼 머지포인트가 돌연 포인트 판매 중단하고 결제처를 대폭 축소하며 논란이 일었다. 선불업 사태의 수습이 정 원장의 첫 번째 시험대로 꼽힌다.
#정치적 외풍에 시달린 ‘금감원장’
금감원의 전신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는 1999년 1월 4일 출범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금융감독기구를 통합해 금융시장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을 권고해서다. 당시 금융감독체계는 정부의 포괄적 지휘 아래 영역별로 은행감독원과 보험감독원, 증권감독원, 신용관리기금 등으로 분산돼 감독을 시행하는 구조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금융정책)과 금감위(감독정책)를 합쳐 지금의 금융위를 신설했다.
금감원은 중앙정부나 지자체로부터 독립해 특정한 공적 업무를 담당하는 무자본 특수법인이다. 정부기관이 아니다. 이는 정치적 외풍과 정부의 영향력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금감원의 역사는 정치적 외풍에 휘둘린 22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감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졌다. 정권이 교체될 경우, 정은보 원장의 임기는 사실상 9개월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이근영 금감원장이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사직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김용덕 금감위원장 겸 금감원장이 취임한 지 6개월 만에 자리를 내놔야만 했다. 권혁세 금감원장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사의를 표명했다. 금감원장 임기는 3년이지만, 역대 금감원장의 평균 재임 기간은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임기를 끝까지 채운 원장은 역대 13명 중 윤석헌 전 원장, 윤증현 전 금감위원장 겸 금감원장, 김종창 전 원장 등 3명뿐이다.
금감원의 역할 조정과 독립기구 탈바꿈 여부도 주목된다. 내부 역할 조정 논의의 핵심은 금융감독 부문을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와 금융소비자보호위원회(금소위)로 이원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금감위는 금융기관 건전성을 감독하고, 금소위는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공급자인 금융기관의 영업행위를 감독하는 방식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 출범 시 공약이기도 하다.
예산과 인사의 독립도 관심거리다. 전임 윤석헌 원장은 금감원 예산과 인사의 독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꾸준히 제기했다. 금융위는 반대 목소리를 분명히 하고 있다. 금감원은 현재 감독 집행, 경비성 예산, 조직, 인력 등 구분 없이 금융위의 통제를 받는다.
공공기관 재지정 방안도 현재진행형이다. 기재부는 금융감독체계 개편의 일환으로 금감원을 공공기관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다 일단 유보 결정을 내렸다. 공공기관 지정 추진은 사모펀드 부실 감독 등이 배경이 됐다. 오는 8월 말 정은보 원장은 기재부와 함께 공공기관 지정 유보 조건인 조직 효율화 방안(구조조정 방안)을 재논의 한다. 공공기관으로 지정되면 정부의 관리 감독을 받고, 예산 집행 현황 등을 상세하게 공개해야 한다.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는 셈이다. 앞서 2007년에도 잠시 공공기관에 지정됐지만, 2009년 감독업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해제됐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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