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해군에 이어 육군에서도 한 부사관이 상관의 성추행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2차 피해에 시달렸다. 소속 군인을 보호해야 할 군의 대처는 미온적이다 못해 폭력적이었다. 그동안 군사법원이 성범죄에 대해 내린 ‘솜방망이 판결’로 볼 때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은 사건들도 적지 않았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5월 공군 성추행 사건이 공론화된 뒤에도 군사법원의 관대한 처벌은 계속됐다. 일요신문은 3회에 걸쳐 군대의 마초문화 속에서 군사법원이 지금껏 성범죄를 어떻게 단죄해 왔는지 살펴본다.[일요신문] 군인이 군인에게 저지르는 성범죄는 군형법상 ‘군인등강제추행’ ‘군인등강간’이라는 죄목이 따로 마련되어있을 만큼 중대한 범죄다. 군인등강제추행죄의 경우 군형법 제92조의3에 따라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형량으로만 따지면 형법상 강제추행보다 더 무겁다. 이는 군대가 매우 엄격한 위계질서에 의해 조직되어 있는 데다 폐쇄적인 군의 특성상 피해를 입어도 피해자가 쉽게 도움을 청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죄를 판단하는 군사법원과 군대 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권위주의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마초문화'다. 마초문화는 군인 간 성범죄의 은폐를 도왔고 나아가 마땅한 처벌이 이뤄지는 것조차 막았다. 군사법원은 범행 의도를 가해자의 입장에서 해석했고 ‘위력’ 여부를 판단했다. 이론상으로는 죄의 인정범위가 사회에서보다 훨씬 넓지만 실제 죄를 판단하는 군사법원의 시각은 달랐다.
#“보여줘, 보여줘” 환호성에 바지 내려
2018년 8월 1일 저녁 무렵, 공군 기지 내 한 회관은 대대원들의 술자리로 떠들썩했다. 판결문에 기록된 공소사실에 따르면, A 대대장은 소속 부대 대대원들을 대상으로 한 ‘국가관 함양교육’이 끝난 뒤 이어진 회식을 주관하던 중 대대 기념품으로 제작한 팬티를 입고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일부가 손을 들자 “진짜 입었는지 확인해야겠다” “벗는 사람들은 대대 공제금 5만 원 빼줘라”고 말했다.
당시 피해자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A 대대장의 지시와 동시에 “벗어라, 벗어라” “보여줘, 보여줘”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디선가 “입었나 안 입었나 확인해 봐야 한다”는 말도 들렸다. 수십 개의 눈동자와 환호성이 피해자들을 향했다. 결국 피해자들은 행사장 앞쪽에 위치한 의자 위에 올라가 바지를 벗고 자신이 입은 팬티가 무엇인지를 인증해야 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려서 팬티를 보여주었으며 이 모습은 사진으로 찍히기까지 했다.
일반 직장에서 벌어졌다면 큰 논란이 되었을 이 사건은 군사법원의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지난 1월 13일 공군본부 보통군사법원은 피해자들이 대대원들 앞에서 팬티를 인증하게 된 상황에 A 대대장의 위력이 미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군사법원은 A 대대장의 업무상위력등에의한추행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그 외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명예훼손, 의무자허위보고 등의 혐의에 대해서는 선고유예를 내렸다.
1심 재판부는 “이 사건 당시 피해자들이 대대 팬티를 인증한 행위가 대대원들이 회식 분위기에 ‘보여줘, 보여줘’를 외쳐서 진행이 된 것인지, 실제로 피고인이 대대장으로서 위력을 행사해 바지를 벗어 팬티를 인증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인지 뚜렷하게 입증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했다.
군 검사는 항소심에서 “(만약) 대대원들이 바지를 내리라고 했으면 바지를 약간 내려 팬티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바지를 완전히 내린 것으로 보아 대대장이 시켜서 했을 것”이라거나 “같이 근무하는 조종사들이 얘기했다면 살짝만 확인해주었을 것이다.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려서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대대장이 시켜서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호소는 2심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A 대대장이 조종사인 피해자들을 관리, 감독하는 지위에 있었음에도 대대원인 피해자들의 명예를 공연히 훼손한 점은 인정되나 A 대대장이 피해자들의 바지를 직접 벗기는 등의 유형력을 행사한 점은 없다”면서 군 검사의 항소를 기각했다. A 대대장이 전체 부대의 지시자임은 맞지만, 피해자들의 바지를 직접 벗긴 적은 없으므로 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초문화가 만들어 내는 범죄
피해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이날의 사건을 ‘흔히 있는 일’ 정도로 치부했다. 이날 자리한 대대원들은 “다른 회식자리에서 종종 팬티체크를 언제 하느냐고 얘기했었는데 남자들끼리의 전우애를 높이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거나 “(이날 회식은) 오히려 자유롭고 좋았다”고 진술했다. “대대원들 사이에 흔히 있는 이벤트였다”고 진술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회식 자리에서 바지를 벗지 않았다.
군사법원도 ‘팬티 인증 사건’을 피해자 개인이 아닌, 조직 전체의 시각으로 보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일부 대대원들이 소속 부대 커뮤니티에 ‘우리도 회식할 때 입고 와서 까보면서 소속감을 고취시킬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인 것 같습니다ㅋ 빨리 입어보고 싶습니다 ㅋㅋ’라는 댓글을 달았다며 팬티 인증은 대대 사이에 종종 나왔던 우스갯소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했다. 평소 이런 장난이 오갔으므로 설령 회식자리에서 바지를 벗으라는 말이 나왔다고 해도 이는 대대장의 위력이 미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왜 유난을 떠느냐’는 관점인데 이는 전형적인 2차 가해적인 시선이다.
이렇듯 군 내에서 벌어지는 군인 간 성추행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폭행을 동반한 경우도 다수였다. 피해자 B 씨는 지난해 5월부터 9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선임 C 씨 등으로부터 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C 씨는 침대에 누워있는 후임병 B 씨에게 “아이스에이지”라고 말해 움직이지 못 하게 한 뒤 B 씨의 티셔츠 안에 손을 넣어 양쪽 젖꼭지를 2분 동안 약 40회 만지고 꼬집었다. 또 다른 날에는 성기를 만지거나 뽀뽀를 하는 등 강제로 추행했으며, 그러면서도 멱살을 잡아 폭행하거나 아무 이유 없이 철모를 쓴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안하무인격인 행위는 계속됐다. 그는 함께 근무를 나간 후임병에게 “머리를 만지면 개처럼 ‘왈왈’ 짖어라”라고 명령한 뒤, 위병소 자동문 앞에서 머리를 만져 개처럼 짖게 했다. 이에 대해 해병 제2사단 보통군사법원은 5월 3일 C 씨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후임병을 개 취급한 행위에 대해서는 “단순 장난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견디기 어려운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발생하지도 않았다”며 무죄로 봤다. 이처럼 ‘군대에서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시각은 범죄의 은폐를 도왔고 피해 사실을 지웠다.
이에 대해 전‧현직 군 관계자들은 군인정신을 가장한 복종 강요 등 위계적인 마초문화가 군 내 성범죄를 낳는 씨앗이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군 관계자는 “회식에서 무조건 술을 마셔야 하고 술을 마시지 못 하면 ‘진정한 남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우애와 소속감 고취를 가장해 후임들에게 수치스러운 벌칙 등을 강요하기도 한다. 불편하지만 장기 복무를 해야 하는 군 간부의 경우 일반 병사보다 이 조직문화에 더욱 복종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군 관계자 역시 “동성 간 성추행에 대해서는 강도가 센 괴롭힘 정도로 치부하고 넘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성범죄에 관해서는 군사법원이 민간법원보다 성인지감수성이 떨어진다는 것에 일견 동의한다”고 말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