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을 통해 자신을 알리고 또 비판받으면서 생각의 지평들을 넓혀야 하는 사람들을 왜 저렇게 웃긴 틀 속에 묶였는지 의문이 지나간다. 도대체 어떤 파고에서 누구를 지켜주기 위한 방파제인가. 무대에 선 사람들, 특별한 사람들이 오히려 초라해 보인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 눈에 띄는 화려한 스펙으로 무대에 오른 사람들 속에서 우리들은 어쩌면 스펙보다도 스펙 뒤에 가려진 태도를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민주적이겠지만 상황에 끌려 다닐 것 같은 후보, 칼 같은 결단력으로 뭔가를 이루겠지만 전체주의적 방식이 숨 막힐 것 같은 후보, 공동의 적을 만드는 일로 힘을 모으고는 전제군주처럼 군림할 것 같은 후보, 몇몇 문제에선 시원해보이지만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믿음이 가지 않는 후보, 힘을 보태고 싶지만 될 것 같지는 않은 후보 등등. 그러니 정말 누가 절대반지를 차지하게 될지 진짜 모르겠다.
그런데 최고의 학벌,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는 절대반지 원정대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폭로전을 하는 양상을 보면 정말 스펙보다는 인품이고, 머리보다는 배, 내공이란 생각이 든다. 자기 머리를 믿고 특별하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특별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일군 것, 그 사람이 자랑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다. 삶에서 남는 것은 한때 사회적으로 통용되었던 스펙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오히려 남는 것은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배운 태도나 인품이다. 이 인품은 스펙을 쫓을 때가 아니라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줬던 그 스펙이 실은 ‘나’의 인격과는 무관했다는 믿음이 생길 때 힘이 붙는다.
'철도원'의 작가 아사다 지로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고 말한 소설이 있다. 바로 청나라 말기 서태후와 그 주변인물을 다룬 4권짜리 장편소설 '창궁의 묘성'이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많은 인물 중에는 청나라의 위대한 군주 건륭제가 있다. 일본의 아사다 지로는 살아서 황제 자리를 물리고, 떡갈나무 지팡이를 짚고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칭하며 매일 바위산에 올라 세상을 관조했다는, 청나라의 건륭제에 매료된 것 같다. 그가 그렇게 된 과정 속에 소설의 주제가 들어있으니.
세상을 호령했던 황제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한 후 포로로 얻은 호자지한의 비를 사랑해 그를 향비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황제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아프가니스탄의 왕비로 죽었다. 소설에서 건륭제는 이렇게 말한다.
“짐은 향비를 사랑하고, 향비는 죽은 호자지한을 사랑했지. 사랑은 백만 명의 병사로도 이길 수 없고, 사랑 앞에서는 어떤 보석도 빛을 잃는구나. 아아, 천하가 이렇게 허무한 것이라니.”
허무하다! 허무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천하엔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 허무의 발견에서 자기가 특별하다고 믿는 아집이 떨어져 나간다. 그래야 또 ‘나’라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
내가 내 것이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줬다고 믿는 것, 그래서 놓을 수 없었던 것을 빼앗기고 나서 분노나 복수심에 불타오르지 않고 오히려 허무하다, 고백하면서 마음이 가난해진 사람, 자유는 거기에 깃든다.
그런 자유인이야말로 세상을 무심히 읽을 수 있고 천명을 읽을 수 있다. 소설 속엔 우리 역사에서는 악명이 높은 이홍장도 세월 속에서 자유로워진 인물로 나온다. 그의 이 성찰의 말이 오래 남는다. “나에게는 천명이 없네. 천명이 없는 자는 천하를 얻을 수 없네. 단지 소란만 피울 뿐이지.”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