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가운데 하나인 US오픈에서 또 한 번 ‘화장실 타임아웃’이 논란이 됐다. ‘화장실 타임아웃’이란 선수들이 세트와 세트 사이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신청하는 휴식 타임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남자 테니스 규정상 한 경기당 ‘화장실 타임아웃’ 신청 횟수는 두 번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시간은 딱히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 즉, 5분이든 10분이든 원하는 만큼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화장실 타임아웃’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선수들이 이를 남용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기 흐름을 끊기 위해, 혹은 자신이 지고 있는 경우 상대의 기세를 꺾기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몰래 코치와 문자를 주고받는다는 의혹에 휩싸인 선수도 있었다. 선수와 팬들 사이에서 점차 찬반 논란이 거세지고 있는 ‘화장실 타임아웃’에 대해서 살펴봤다.
지난 8월 31일, US오픈 1라운드 경기가 펼쳐지고 있던 ‘아서 애시 스타디움’. 앤디 머레이(112위·영국)가 초조하게 코트를 서성이면서 분을 삭히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 선수인 스테파노스 치치파스(3위·그리스)가 7분이 지나도록 코트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트 스코어 2 대 2로 팽팽히 맞선 상태에서 마지막 5세트를 남겨두고 ‘화장실 타임아웃’을 신청한 치치파스는 자리를 비운 지 8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야 마침내 코트로 복귀했다. 치치파스는 기다리고 있던 머레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이스박스에 있는 생수를 집어들고 태연히 벤치에 앉았고, 이 모습을 보고 격분한 머레이는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일어나! 도대체 뭐하는 거야, 일어나!”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관중석에서도 야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가 잔뜩 나있던 머레이는 결국 연달아 실책을 범했고, 결국 5세트에서 6 대 4로 패해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머레이가 이렇게 분노한 이유는 ‘화장실 타임아웃’ 때문만은 아니었다. 치치파스는 3세트를 마친 뒤에는 ‘메디컬 타임아웃’을 신청하면서 10분 동안 경기를 중단시켰고, 자신의 서브 게임에서 뒤지고 있자 갑자기 라켓을 바꾼다면서 또 한 차례 경기 흐름을 끊기도 했다.
경기가 끝나고 다음 날 머레이는 트위터를 통해 치치파스의 이런 행동을 맹렬히 비난했다. “오늘의 팩트. 스테파노스 치치파스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데 걸린 시간은 제프 베이조스가 우주여행을 하는 데 걸린 시간의 두 배다.” 그러면서 머레이는 “화장실 타임아웃을 신청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코트를 비운 시간이었다. 나는 경기 중에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나는 이로써 그에 대한 존경심을 잃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사실 긴 휴식시간은 선수의 몸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머레이는 “몸이 식는다. 경기 중에는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되는데 긴 휴식을 취하면 아드레날린이 줄어든다. 그날도 바로 그런 느낌이었고, 약간 맥빠진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를 더욱 기분 나쁘게 했던 사실은 치치파스가 상습적으로 그런다는 데 있었다. 실제 치치파스는 2라운드에서 만난 프랑스의 아드리앙 마나리노와의 경기에서도 ‘화장실 타임아웃’을 신청한 후 8분가량 코트를 벗어나서 야유를 받았다. 기다리는 동안 마나리노는 몸이 식지 않도록 계속해서 서브를 넣고 있어야 했다. 치치파스는 코트로 돌아온 후 마지막 4세트를 이기고 결국 3라운드에 진출했다.
치치파스의 ‘화장실 타임아웃’이 논란이 되자 선수와 팬들 사이에서는 다시금 찬반 논란이 거세졌다. 누구보다 분개한 사람은 알렉산더 즈베레프(5위·독일)였다. 2주 전 열린 신시내티 마스터스 준결승에서 치치파스를 만난 즈베레프는 “치치파스의 ‘화장실 타임아웃’ 시간은 비정상적으로 길다”면서 “경기 때마다 그런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신시내티에서 나와 경기를 할 때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었는데, 이제 다시 여기에서도 그러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당시 경기에서 팽팽한 접전 끝에 첫 세트를 졌던 치치파스는 ‘화장실 타임아웃’을 신청한 후 가방을 짊어진 채 코트를 떠났다. 땀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치치파스는 8분 넘게 코트로 돌아오지 않았고, 이에 화가 난 즈베레프는 심판에게 격하게 항의했다.
다시 코트로 돌아온 치치파스는 완전히 달라진 경기력과 전술을 선보였다. 그렇게 2세트를 이겼지만, 3세트를 가져왔던 즈베레프가 결국 이기면서 경기는 끝났다. 경기를 마친 후 즈베레프는 치치파스가 화장실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화장실에서 몰래 코치인 아버지에게서 문자메시지로 코칭을 받았다는 것이다.
치치파스가 들고 나갔던 가방 안에 휴대폰이 있었다고 의심하는 즈베레프는 “치치파스는 10분 이상 코트를 비웠다. 그의 아버지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다시 돌아왔을 때 갑자기 치치파스의 전술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즈베레프가 주심에게 항의를 하는 동안 카메라가 치치파스의 아버지인 아포스톨로스를 비추면서 신빙성 있게 들렸다. 당시 관중석에 앉아있었던 아버지는 놀랍게도 휴대폰으로 타이핑을 치고 있는 듯 보였다.
테니스 경기에서는 워밍업이 시작된 후 코칭을 받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발각될 경우에는 최대 2만 달러(약 2300만 원)의 벌금 및 벌칙이 부과될 수 있다. 실제 이런 일은 간혹 벌어지곤 한다. 한 투어 관계자는 주니어 경기 때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코트를 떠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곤 했다고 고백했으며, 또 다른 선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바나나를 건네받는 친구 선수가 한 명 있었다고 귀띔했다. 껍질이 벗겨져 있던 바나나 속에는 코칭 팁이 적혀 있는 쪽지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화장실 타임아웃’을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2009년 US오픈 준결승 진출자인 야니나 위크마이어는 실제 많은 선수들이 ‘화장실 타임아웃’을 이런 목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하면서 “선수들의 흔한 전략”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 경기 중에 소변을 볼 일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코트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다. 선수들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라고 덧붙였다.
호주 선수들을 지도하는 전 ATP 선수인 조셉 시리아니 역시 “나는 선수들에게 만약 첫 세트를 6 대 0으로 졌다면,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몇 분 동안 앉아있다가 돌아가라고 조언한다”면서 이에 동의했다. 이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 방법이야말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상대의 리듬을 깨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고 시인했다.
사실 테니스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고립된 채 홀로 싸우는 종목이다. 코트에서는 숨을 곳도, 의견을 나눌 사람도 없다. 두 시간, 세 시간, 때로는 다섯 시간 동안 선수들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다. 때문에 선수들이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화장실로 탈출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시끄러운 코트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보내면서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기 때문이다.
치치파스 역시 이런 입장이다. “나는 규정을 어긴 적이 없다”며 억울함을 호소한 그는 "나는 스톱워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말해줄 사람이 없다”고 주장했다. 땀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왔을 뿐이라고 말한 그는 “나는 남들보다 땀을 많이 흘린다. 세트를 시작하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코트를 밟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치치파스는 ‘화장실 타임아웃’을 갖는 선수가 비단 자신만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세계 랭킹 1위인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나 머레이 역시 종종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실제 머레이 역시 지난 2012년 US오픈 결승전에서 5세트 직전에 한 차례 화장실을 다녀왔다. 다만 시간은 3분가량 정도였다. 결국 조코비치를 누르고 우승한 머레이는 훗날 화장실에서 무엇을 하고 왔냐는 질문에 “혼잣말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다. 가령 ‘넌 이 경기에서 절대 지지 않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이제 네 차례야’라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기분이 이상했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변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이길 줄 알았다”고 경험담을 소개했다.
‘화장실 타임아웃’으로 가장 악명 높은 선수는 조코비치다. 자신에게 경기가 불리하게 흘러가거나 중요한 순간이 닥칠 때마다 종종 화장실을 찾거나 메디컬 타임아웃을 신청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코비치에 대해 다른 선수들은 “이제 화장실 휴식은 조코비치의 하나의 전술이자 중요한 기술이 됐다”고 비꼬았다. 머레이는 조코비치가 2015년 호주오픈에서 ‘메디컬 타임아웃’을 신청하자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항상 그러니깐”이라며 투덜거렸다.
조코비치는 올해 프랑스오픈에서도 결승전을 포함해 두 차례 ‘화장실 타임아웃’을 사용했다. 결승에서 조코비치를 만난 치치파스는 분노보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90분 만에 1, 2세트를 내준 뒤 화장실을 다녀온 조코비치가 갑자기 내리 3세트를 이긴 것에 대해 치치파스는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조코비치는 갑자기 전혀 다른 선수가 돼서 돌아왔다”며 얼떨떨해 했다.
이에 대해 조코비치는 “나는 주로 정신적으로 리셋해서 환경을 바꾸는 데 화장실 휴식을 사용한다”고 말하면서 “비록 짧은 휴식일지라도 심호흡을 몇 번 하면 새로운 기분이 된다”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조코비치의 매경기 득점표, 라이브 블로그, 경기 동영상, 언론 보도를 분석한 결과 조코비치가 2013년 이후 주요 대회에서 경기 중간에 화장실에 간 횟수는 모두 열두 번이었다. 이 가운데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4세트를 치르고 난 후의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열두 번 가운데 열 번은 조코비치가 다음 세트를 가져갔다.
2014년 윔블던 결승전에서 로저 페더러(9위·스위스)를 만난 조코비치는 4세트를 진 후 화장실로 향했다. 이에 대해 조코비치는 “나는 화장실 안에서 변기를 보고 있었다. 4세트에서 있었던 일은 잊고, 놓친 기회는 잊고,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화장실에서 돌아왔던 조코비치는 5세트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2019년 윔블던 결승전도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페더러와 맞붙은 조코비치는 페더러에게 2세트를 내준 후 또 화장실 휴식 시간을 가졌고, 5분 정도 지난 후 돌아와서는 다른 경기력을 선보이면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사정이 이러니 화장실 휴식 시간이 과연 선수들의 정당한 권리인지, 아니면 게임즈맨십(선의의 경쟁이나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무시한 채 오직 승리만을 추구하는 성향)인지에 대한 논란도 한창이다. ‘화장실 타임아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수들이 화장실로 향하는 이유가 부정 행위를 저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꼭 필요해서인 경우가 더 많다고 말한다. 가령 무덥고 습한 날씨나 강한 햇빛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장실 타임아웃을 신청하는 경우도 많으며,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이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미국의 라일리 오펠카(24위·미국)는 “경기 중에는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양말, 신발, 셔츠 등을 갈아입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데는 보통 5~6분이 걸린다. 화장실에서 코트까지 이동하는 시간도 있다”고 말했다. 매디슨 브렝글(78위·미국) 역시 화장실 휴식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번은 경기 중에 식중독에 걸린 적이 있었다. 5분 동안 화장실에 앉아서 쉬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져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반면, 1985년 US오픈 챔피언인 하나 만들리코바는 “나는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한번도 화장실 휴식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지금의 선수들이 우리 때보다 더 많은 세트를 뛰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상대 선수의 리듬을 깨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토너먼트에 거액이 걸려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화장실 타임아웃’ 테니스 규정은? 시간 제한 없어 논란
국제테니스연맹(ITF)에 따르면, “선수는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서, 경기복 교체를 위해서, 또는 둘 다를 위해서 적절한 시간 동안 코트를 떠날 수 있도록 요청할 수 있다. 이외에 다른 이유로는 경기장을 떠날 수 없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다만 ‘화장실 타임아웃’은 각 세트가 끝난 후에 신청할 수 있으며, 3세트 경기에서는 최대 한 번, 그리고 5세트 경기에서는 최대 두 번 신청할 수 있다.
워밍업을 시작한 후에 신청하는 모든 화장실 휴식은 한 번으로 간주된다. 만에 하나 응급 상황으로 세트 중간에 가야 한다면, 자신의 서비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신청해야 한다.
이때는 선심 한 명이 선수들이 ‘다른 목적으로 휴식 시간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동행하게 된다. 다만 한계는 있다. 화장실 안까지 선수를 따라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사용 가능한 휴식 시간이 따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규칙에 따르면 선수는 정확한 시간 규정 없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시간 제한을 두지 않은 이유는 테니스 경기장마다 화장실 위치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실제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열린 한 프로 서킷 대회에 참가했던 위시엔 장은 화장실 타임아웃을 신청한 후 10분이 지나서야 코트로 복귀한 이유에 대해 "화장실이 코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해명한 바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