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골키퍼로 활약했던 윤기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사진은 윤기원 추모 사이트. |
레벨이 1, 2군으로 나뉘어 있다고 해서 2군들이 모든 걸 잃어버린 건 아니다. 열정만큼은 분명히 있다. 몇몇 가족, 친지들과 경기 감독관 등 경기 관계자들만이 R리그 경기장(대개는 보조구장) 스탠드를 지키지만 혹시 찾아올지 모를 희박한 기회를 잡기 위해 오늘도 구슬땀을 흘린다.
청운의 꿈을 안고 프로 무대에 입단했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지만 금세 찾아온 시련 앞에 시무룩해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무엇보다 골키퍼 포지션이 심하다. 자릿수도 워낙 적은 데다 자신의 활약이 성적과 직결될 수 있다는 스트레스와 중압감 탓이다.
얼마 전 인천 유나이티드 골키퍼로 활약했던 윤기원이 자신의 차량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각에서는 작년 중순부터 흉흉하게 나돌았던 사설 스포츠 베팅과 승부조작에 연루된 게 아니냐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축구인들은 “비주전에서 주전으로 도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벤치로 돌아가게 된 상황도 (자살을 결심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반응을 내보였다.
프로 2년차였던 윤기원은 지난해까지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 올 시즌 허정무 감독의 신뢰를 받으며 주전 자리를 꿰찼지만 다시 서브로 밀려났다. 당시 골키퍼 대선배인 경남FC 김병지는 자신의 트위터에 ‘세상에 던져진 슬픔을 되돌리고 싶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아픔을 표현했다.
인천 입단에 앞서 경남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던 윤기원이 K리그 경남전이 끝난 뒤 김병지의 트위터를 방문해 ‘2010년 드래프트 전, 경남에서 입단 테스트 경기를 했던 윤기원입니다. 어제 같은 경기장에서 뛰어서(후략)’란 글을 남긴 것에 대한 답글이었다.
강원FC 골키퍼들은 구단 직원으로부터 윤기원의 소식을 접한 뒤 “(윤)기원이가 활약이 저조한 걸 고민하다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면 정말 힘들고 아플 사람은 바로 부끄러운 성적표를 받고 있는 우리들”이라며 참담한 심정을 전하기도 했다. 실제로 강원은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큰 목표를 정했지만 지독한 부진 속에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클럽 셀틱FC에서 뛰고 있는 국가대표팀 에이스 기성용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강원 홍보팀 직원 권민정 씨는 “선수들로부터 들어보니 골키퍼들의 스트레스가 정말 크다고 한다. 다른 포지션은 실점 책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지만 득점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골키퍼들은 아무리 잘해도 무승부가 최고 성적일 뿐이다. 실점을 하고나면 밤새도록 그 장면이 떠올라 한숨도 자지 못하고 다음 날 일과를 소화해야 할 때가 많다고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1군 스쿼드에 포함된다고 해서 모든 이의 환경이 꼭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베스트 멤버들과 그렇지 않은 선수들은 구분되기 마련이다. 그라운드를 밟을 수 있는 이는 선택받은 자로 축복을 받는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은 스스로를 ‘떨거지’라 부르며 설움을 토로한다.
가끔씩 일간지들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축구 선수의 시민 폭행’ ‘행인들과 시비 붙은 축구 선수’ ‘음주 후 패싸움’ 등 좋지 못한 사건에 연루되는 선수들은 대개 2군 혹은 1군이지만 주로 벤치를 지키는 서브 멤버들이다.
점심 식단이 뷔페와 햄버거의 차이라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의 그것에서 보여주듯 2군들의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일부 구단들의 경우 2군들에게는 아예 숙소를 제공하지 않을 때도 있다. 선수단 관리 감독이 주력인 1군에 집중되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연봉을 후하게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봉 1200만 원짜리 연습생의 처우와 비슷하다. 그나마도 이리저리 세금을 제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월급은 고작 80만~90만 원. ‘프로’라는 타이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액수다.
각종 수당은 꿈도 꿀 수 없다.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최소한의 액수로 선수단을 꾸려가는 클럽들의 사정에 따라 1군들의 무대에서도 많이 줄어드는 판국에 R리그에 나서는 선수들에게 풍족하게 자금을 풀 턱이 없다.
비주전과 2군 선수들이 금전적인 유혹을 받는 것도 이러한 환경이 큰 역할을 한다는 지적이다. 한 지방 구단의 관계자는 “2군들이 돈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사행성 불법 베팅 업체들이 2군들이나 경기에 뛰지 않는 1군 일부를 타깃으로 정하고 접촉한다고 한다. 1군들도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요즘에는 중국에 베이스를 둔 베팅 업체들이 2군 무대인 R리그까지 손을 뻗친다는 소문이 있다”고 고개를 저었다.
훈련 환경도 다르다. 1군들이 사계절 천연잔디에서 풀 트레이닝을 진행한다면 2군들은 거의 인조잔디에서 뛴다. 심지어 몇몇 시민구단들은 최소한의 환경이라 할 수 있는 인조 잔디 그라운드도 빌리지 못해 대학교 운동장 트랙을 도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1, 2군이 유일하게 동일한 점은 1년에 두 켤레씩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축구화 숫자와 유니폼과 트레이닝복, 운동화가 전부다.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했지만 별 활약 없이 쫓겨나다시피 대전으로 팀을 옮겨야 했던 황진산은 “관중들의 갈채를 받으며 가끔씩 출장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지금의 생활이 정말 행복하다”고 회상한다. 황진산은 대전에서도 2군을 전전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황진산의 눈물겨운 성장기에는 원치 않았던 이적과 1, 2군을 오가는 ‘스타플레이어 아닌’ 평범한 선수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