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보은 갚겠다"
기시다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중의원을 지낸 정치가 집안에서 자랐다. 이른바 ‘금수저’를 물려받은 정치인이다. 와세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일본신용은행에 입사했지만, 1987년 부친 기시다 후미타케 중의원의 비서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보은(報恩)을 계속 갚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부친이 사망한 뒤 지역구인 히로시마를 물려받아 1993년 중의원에 첫 당선됐다. 2012년부터는 자민당 내 온건파로 분류되는 파벌 ‘굉지회’의 수장을 맡아오고 있으며 외무상, 방위상, 자민당 정조회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실 기시다는 “결단력이 부족하다” “발신력(전달 능력, 홍보력)이 떨어진다” 등의 비판을 받아왔다. 그래서인지 대중들에게도 인기가 높진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재빨리 출마를 표명했다. 아울러, 5년 넘게 자민당 ‘실세’로 군림해온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을 염두에 두고 ‘당직 임기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대장부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외신들 “온건하지만 카리스마 부족”
미국 CNN 방송은 “기시다가 합의 형성을 중시하며 안전하고 안정된 정치를 선호한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국민과 일반 당원으로부터의 지지는 별로 없었지만, 자민당 내 파벌 실력자들의 지지를 얻어 승리했다”며 이번 선거 결과를 분석했다.
프랑스 르몽드는 기시다를 “온건하지만 카리스마가 부족한 인물”로 평가해 주목을 끌었다. 덧붙여 “그의 가족이 원폭 피해를 받았던 히로시마 출신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다만, 일본 언론들은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에서는 총리 교체만으로 외교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본다. 실제로 지난 9월 24일 외교·안보 분야 토론회에서 총리 후보자들은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와 같은 한일 현안에 대해 “기존 아베·스가 내각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장기집권 후 단명정권 징크스 깨질까
일본 정계에는 “장기집권 이후 들어서는 내각은 빨리 무너진다”는 징크스가 있다. 가령 87, 88, 89대 일본 총리(2001~2006)를 지낸 고이즈미 준이치로 이후 6년간 총리가 무려 6번이나 교체됐다. 이런 흐름을 끊고 아베 총리가 최장 집권했지만, 그 뒤 들어선 스가 내각 역시 1년으로 단명하고 말았다.
후지TV의 히라이 후미오 논설위원은 “기시다 내각이 단명으로 끝날지 알 수 없으나 ‘저금’과 ‘선물’을 넘겨받은 이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요컨대, 저금은 아베 전 총리가 남긴 ‘국정선거 6연승’이다. 덕분에 중의원, 참의원 모두 과반수를 탄탄히 확보하고 있어 한 번의 선거에서 다소 지더라도 매년 예산은 통과된다.
선물은 퇴진하는 스가 총리의 성과를 빗댄 말이다. 백신 접종이 순조롭게 진행돼 최근 코로나 확진자 수가 크게 줄었고, 골칫거리였던 도쿄올림픽도 마쳤기 때문에 앞으로 큰 현안이 없다. 10월부터는 위드 코로나 정책이 시행될 예정이라 오히려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는 상황이다.
히라이 논설위원은 “이만 한 저금과 선물이 주어졌으니, 자민당은 굳이 무리수를 두기보다는 안정을 선택해 지키기에 들어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만 “기시다가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지켜볼 일”이라고 덧붙였다.
관료개혁 문제에 힘을 쏟고 있는 아사히나 이치로 아오야마샤추(青山社中) 대표는 기시다에 대해 “인품적으로는 어쨌든 신사다. 그러나 연설이 지루한 면이 있으며 위트와 화술이 부족하다”고 평한 바 있다. 총리가 된 후 기시다의 모습은 “인기가 크게 오르지도 않겠지만 극단적으로 내려가지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상당한 난제가 닥치지 않은 한, 견실하게 정권운영을 해나갈 것 같다”는 소견이다. 하지만 “전달능력과 결단력이 약점으로 꼽히기 때문에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예측불가”라며 말을 아꼈다.
#야당 “아베 전 총리의 입김이 작용한 선거”
총재에 당선된 기시다를 두고 야권에서는 ‘아베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이 흘러나오고 있다. 입헌민주당의 에다노 유키오 대표는 “자민당은 바뀌지 않는다,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이번 선거가 보여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는 “기시다가 내건 ‘정치신뢰 회복’이 아베 전 총리의 영향 아래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 엄격하게 따져보겠다”고 밝혔다.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 위원장 역시 “자민당이 이번에도 아베 직계 노선을 선택했다”며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 일본 언론들은 “기시다 총재가 자민당 내 주요 파벌 지도부의 지지를 받은 만큼 아베·스가 내각의 노선을 대체로 따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가 찜한 후보는 패배” 징크스 남기고 내려오는 스가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패배의 아이콘’으로 전락할 위기다. 닛칸스포츠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일본 정계에서는 ‘스가가 지지하는 후보는 총재선거에서 불리하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고 한다. 이번 총재선거에서도 스가가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힌 고노 다로가 큰 차이로 완패했기 때문에 소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소문의 발단은 1998년 자민당 총재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스가는 소속돼 있던 파벌의 수장 오부치 게이조에게 반기를 들고,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지원하고 나섰다. 하지만 투표 결과 오부치가 225표, 가지야마는 102표를 얻어 더블스코어로 지고 말았다. 2009년 총재선거에서도 당시 40대였던 고노 다로를 옹립했으나, 다니가키 사다카즈에게 역시 더블스코어로 완패했다.
총재선거만이 아니다. 지난 8월 요코하마 시장선거에서는 오코노기 하치로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역효과만 초래해 참패했다. 스가 정권의 코로나19 대책 및 도쿄올림픽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던 탓이다. 이로써 “스가가 찜한 후보는 패배한다”는 징크스가 회자되고 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