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와 불과 땀으로 완성되는 인쇄예술의 백미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려시대에 창안되었으나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고종 때 문신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는 “금속활자로 ‘상정예문’ 28부를 찍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1239년(고종 26) 목판본으로 간행된 선종의 지침서 격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권말에 “개경의 서적점에서 이전에 찍은 금속활자본을 견본으로 삼아 다시 새겨 찍어낸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직지’ 발간 때보다 훨씬 이전부터 금속활자 인쇄가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금속활자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크게 발달했다. 태종 재위 때인 1403년에는 처음으로 주자소를 설치해 구리로 약 10만 자의 금속활자를 주조했는데, 이것이 바로 계미자(癸未字)다. ‘계미자’란 계미년에 만들어진 활자를 의미한다.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지며 금속활자도 한 단계 발전하게 된다. 경자자는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글자 획을 박력 있고 예쁘게 주조한 것으로 인쇄할 때 활자가 움직이지 않아 인쇄 능률이 크게 올랐다고 한다. 뒤이어 세 번째로 개량된 활자가 역시 세종 재위 때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다. 갑인자는 경자자의 글씨체보다 조금 크고 획이 바른 필서체의 활자로, 큰 활자와 작은 활자의 크기가 서로 같고 옆줄이 정연하게 일직선을 이루어 인쇄를 하면 아름답게 나타났다. 특히 갑인자로는 한자 활자뿐만 아니라 한글 활자도 함께 만들어져 활용됐는데, 이는 세종이 우리글을 창제하고 최초로 만든 한글 금속활자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세종 때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활자가 만들어졌다. 활자 계보에 오른 금속활자만도 그 종류가 무려 35종에 이른다. 안평대군의 독특한 글씨체를 활자의 본으로 삼은 ‘경오자’(庚午字)와 같이 우리나라 명필가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한 활자가 17종 있는가 하면, 중국 역대 왕조 때 간행된 책의 글자체를 바탕으로 한 것도 18종이나 있다.
금속활자를 재료별로 보면, 놋쇠로 만든 동활자, 납으로 만든 연활자, 무쇠로 만든 철활자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중 주로 쓰인 것은 동활자였다. 또한 금속활자를 주조한 주체별로 보면, 주로 관공서에서 만들어 썼지만, ‘율곡전서자’(홍계희가 스승인 도암 이재의 ‘율곡선생전서’를 출판하고자 문하생 및 벗들과 함께 주조한 철활자)처럼 민간에서 만들어 낸 활자도 있었다.
우리 금속활자는 주조(鑄造) 기법으로 제작된다. 제작 과정은 글자본 만들기, 원형 만들기, 주조, 마무리 작업 등 크게 네 과정으로 나뉘며, 주조 기법에 따라 밀랍주조기법과 모래주조기법으로 구분된다. 밀랍주조기법은 주로 초기에 쓰인 방식으로,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들기 때문에 같은 글자라도 활자마다 모양과 크기가 달라서 조판 상태가 가지런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모래주조기법은 모래로 주물틀을 만들어 위쪽에 난 구멍에 쇳물을 부어서 활자를 주조하는 방식으로 갑인자가 만들어진 이후 보편화되었다. 이 기법은 각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므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금속활자는 글씨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과학과 기술을 총망라하여 만들어낸 종합예술품이자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전통공예기술이다. 오늘날 금속활자는 전통기법을 토대로 현대화된 장비도 활용하여 제작되고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금속활자로 복원한 고 오국진 선생이 1996년 초대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돼 활동했으며, 2009년부터 임인호가 그 뒤를 이어 제2대 보유자로서 전통 활자 주조법을 지키며 명맥을 잇고 있다.
정보와 매체가 급속도로 발달해 이제 컴퓨터와 프린터만 있으면 얼마든지 인쇄가 가능한 이 시대에 과연 금속활자의 전통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라는 자부심 때문만은 아닐 듯하다. 금속활자를 탄생시키고 활용해온 선조의 지혜와 도전 정신이 후손인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도록 영감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자료 협조=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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