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시절 ‘악바리’ 타지 생활 연기에 큰 도움…인스타 팔로어 35배 쑥! “전세계 공감 예상 못해 얼떨떨”
“‘오징어 게임’ 촬영에 들어가기 전 탈북민 관련 다큐멘터리 가운데 ‘마담 B’라는 작품을 봤어요. 그 안에 두 아들이 나오는데 둘째 아들에게 내재된 분노가 눈을 통해서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또 음의 높낮이가 없는 말들을 죽죽 뱉는데 그 안에서도 엄청난 분노를 느꼈어요. 그 사람의 과거가 보였다고 생각했죠. 그런 점을 새벽이를 연기하면서 많이 생각하려 했어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악바리 근성 같은 걸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오징어 게임’ 속 정호연이 맡은 강새벽은 그의 말처럼 악과 깡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탈북민으로 이미 남한 땅을 밟기 위해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에게 또 다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오징어 게임’ 속 게임들은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다. 어린 동생과 함께 살 집을 구하고, 누구에게도 무시 받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새벽은 제일 어린 나이임에도 산전수전 다 겪은 노쇠한 전사의 눈빛을 하고 있다.
456억 원의 상금을 놓고 경쟁하는 모든 이들을 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그는 ‘오징어 게임’ 속에서 가장 자기방어가 강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런 새벽을 연기하기 위해 정호연은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옛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고 말했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해외를 돌며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그때가, 참가자들 사이에서 외딴 섬처럼 솟아 있는 새벽의 모습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란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정호연은 살짝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만일 제가 해외에서 생활하지 않았다면 새벽이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왜냐면 한국에서 저는 굉장히 ‘하이 텐션’이라 많이 밝았고 말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외국에 가면 비행기 타는 것부터 전혀 모르는 외국 지역의 호텔 예약까지 모두 저 혼자 해야 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겨도 그걸 나눌 사람이 없었죠. 나누지 못하고 속으로 삼켜야 했던 그런 시간들이 (새벽이와) 비슷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일찍이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야 했던 만큼 정호연의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는 ‘강박’과 ‘승부욕’으로 정리됐다. 17세 때부터 모델의 길로 들어서며 온스타일의 슈퍼모델 선발 서바이벌 프로그램 시리즈인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고, 해외에 진출해서는 ‘빨간 머리 동양인 모델’로 입지를 다졌다. 모델이라면 누구나 서고 싶어 하는 쟁쟁한 브랜드 쇼마다 올랐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커리어 하이에서도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는 모델계의 냉정한 현실이 정호연을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다. 새벽을 보며 자신을 떠올렸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린 시절엔 항상 스스로 일을 따내야 한단 강박이 있었어요. 너무 잘해야 하고, 해내야 하고, 보여줘야 한다는 승부욕도 강했죠. 그런데 해외에 나가게 되면서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믿고 맡겨야 하는 상황에 놓였어요. 그 당시 받았던 가장 당황스러웠던 질문이 ‘넌 어때, 지금 편해?’라는 질문이었는데 그제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줄 안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내 승부욕에 나를 가둬 놓고 너무 나를 옥죄면서 살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씩 밸런스를 맞춰 그 중간에 존재하려 노력했죠. 새벽이를 연기하면서도 주변 분들이 저를 도와주려는 에너지를 느끼며 받아들이게 됐고, 그래서 제 스스로를 옥죄는 강박을 빨리 헤쳐 나왔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정호연은 밝았다. 첫 도전이었던 연기는 매일매일이 서바이벌 게임 같았고, 매 신을 찍을 때마다 화면으로 보는 자신의 모습이 민망해 온몸을 배배 꼬아야 했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은 어딜 가지 않았다. 오디션 시작부터 ‘일단 해보고 보자’라는 근성으로 시작된 도전이었기에 스스로 지치거나 괜히 사서 자책하는 일은 없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런 '새내기 배우' 정호연의 빠른 적응에 도움을 준 것은 역시 함께한 배우들이었다. 주인공 성기훈 역의 이정재를 큰오빠, ‘브레인’ 조상우 역의 박해수를 작은오빠 같았다고 말한 정호연은 이 두 사람에게 연기적으로나 ‘인간 수업’으로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교육(?)은 주로 술자리에서 이뤄졌고, 그 술자리를 주도한 것은 정호연이었다.
“개인적으로 술을 되게 좋아하는데 ‘오징어 게임’에서 본격적으로 술을 잘 배운 것 같아요(웃음). 어릴 땐 항상 일만 했으니까 혼자 와인 마시는 정도로만 즐겼거든요. ‘오징어 게임’을 찍으면서는 술자리에서 연기 이야기도 많이 하고, 제가 얻을 수 있는 것도 많았어요. 아니 선배님들하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어요. 그래서 매번 ‘선배님들, 오늘은 어떠십니까!’ 하고 제가 먼저 권했던 건데(웃음). 그런데 나중엔 선배님들이 ‘호연아, 그래서 오늘도 마실 거야?’ 하고 묻기도 하셨고 제가 안 여쭤 보면 좀 서운해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그랬어요(웃음).”
‘오징어 게임’에서 케미스트리를 꼽자면 새벽과 지영(이유미 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국내 시청자들은 물론 ‘전 세계 오열’을 불러일으켰던 가장 어린 두 캐릭터 사이의 우정은 그를 연기한 27세 동갑내기 두 배우의 우정으로 이어졌다. 붙어만 있어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탓에 배우들도 평상시 감정으로 연기해야 할 신에서조차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고.
“지영이가 새벽이한테 같이 하자고 하는 신이 있었는데 그 신에서 유미랑 저랑 둘 다 대사를 뱉고 ‘컷’ 소리가 들리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거예요(웃음). 그러면서 ‘야, 나 왜 슬프냐? 왜 울컥하냐?’ 했던 기억이 있어요. 또 지영이와 같이 앉아서 과거 이야기를 하는 신에서도 눈물이 너무 계속 나서 잠깐 쉬어가야 하기도 했고요. 제가 시나리오 읽을 때 제일 많이 울었던 신이었기도 한데, 사실 이렇게 전 세계 분들이 다 공감을 해주실 거란 예상을 못 했어요(웃음).”
앞으로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는 ‘배우 정호연’의 연기 인생은 이제 겨우 막 걸음을 뗐다. ‘오징어 게임’의 열기에 맞춰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수준이 아니라 모터를 돌리고 있는 소속사와 함께 천천히 차기작을 준비할 예정이다. 여전히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일들이 얼떨떨하다는 그는 “그래도 아직 정호연은 정호연이다”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너무 큰 일이 한 번에 일어나서요(웃음). 아직 모든 일이 정리됐다기보단 계속 들어오는 시간인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정신도 없으면서 한편으론 이것들을 잘 정리하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 하나하나 실감해 나가고 있는데 최대한 지금 할 수 있는 것, 하루하루 제게 주어진 것을 잘 정리하고 잘 해내면서 겸손하게 발전해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엄청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저는 아직 저인 것 같거든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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