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풀어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논다. 모래성을 쌓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고, 바닥에 선을 긋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이터를 만든다. 본래 아이들은 창조자인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모이는 대문 밖은 아이들 스스로가 운영해가는 유치원이고 학교였다. 어른들은 그저 울타리만 쳐주면 됐다.
놀이의 수를 정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게임의 수는 엄청나다. 그 게임들은 조금씩 다른 규칙을 가진다. 이 점에 착안하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가족 유사성’에 주목했다. 형제·자매들은 닮는다. 동생과 나는 눈이 닮았고, 오빠와 나는 코가 닮았다. 동생과 오빠는 귀가 닮았다고 해보자.
한 부모 아래서 태어난 형제자매들은 이렇게 닮아 유사한 분위기를 만들지만 그들을 가족으로 만드는 공통된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눈이 닮은 동생과 나는 코가 다르고, 귀가 닮은 동생과 오빠는 눈이 다르다. 그래도 이들은 어쩐지 닮았다. 이 ‘가족 유사성’ 개념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개념을 개념이게 하는 본질이 없지만 그래도 그 개념은 사태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한 방향과는 다른 지점에서 그의 게임이론이 좋다. 각기 다른 규칙의 게임을 익히다 보면 융통성이 생긴다. 이 게임에서 통용되던 규칙과 능력이 저 게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그렇다고 저 게임을 욕하거나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규칙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게임을 좋아했는지. 이런 저런 게임을 하다 보면 어떤 게임은 내게 유리하거나 편하지만, 또 다른 게임은 재미가 없거나 불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놀이의 맥락을 이해하게 되고, 함께하는 친구의 성격을 파악하면서 ‘이해’와 ‘공감’을 배우게 된다. 싫은 것은 규칙이나 친구들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친구다. 그런 친구가 힘을 발휘하는 놀이는 금방 죽은 놀이가 되어 아이들이 빠져나간다. 규칙은 상대적이지만 제멋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 어릴 적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놀았던 놀이들이 소재다. ‘오징어 게임’은 그 놀이들에서 규칙 따르기만을 떼어내 감정과 감각에 두려움을 입힌 것 같다. 모두들 생존을 위한 귀신이 되게 만드는 세상, 그러니 생존도 보장받지 못하는 세상 말이다.
그 놀이들은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하는데 단순한 놀이가 규칙 설계자에 의해 목숨을 건 게임이 되다 보니 무궁화 꽃도 무심히 피지 못하고 쓰러져가는 동료들의 피밭에서 삼엄하게 피어난다. 생각 없이 움직인 사람은 피 흘려 죽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겁에 질리고, 위악적인 사람은 고립된다. 인정사정없는 현대사회의 실체를, 그 디스토피아를, 살고 싶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본능의 긴장을 그대로 보여주며 우리 사는 이 땅이 바로 지옥이라고 일러주는 것 같다. 정신 차리라고!
어릴 적 우리가 놀이에서 배운 것은 규칙 따르기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거기서 놀이에 몰입하면서 ‘나’를 잊고 ‘나’를 넘어서는 감각을 배웠다. ‘나’의 껍질을 깨고 ‘나’를 표현해내는 능력, 함께 공감하며 행복을 만들고 친구를 만들어내는 능력! 어쩌면 우리의 과제는 누군가 통제의 수단으로 만든 게임의 계약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린,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놀이감각을 회복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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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