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지위가 가져오는 권력으로 인해 지나치게 대담해지는 상사들이 있다. 팀 내 분위기가 어떻든 엄연히 직장에서 지켜야 할 기본이 있는 법인데 크게 개의치 않는 행동으로 부하직원을 놀라게 만든다.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K 씨(여·29)는 회계부서에서 구매팀으로 업무 지원을 나왔다가 부서장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에 자리에 앉아서 대놓고 잔다는 것. 잠깐 조는 거야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지만 참을 수 없는 건 ‘소음공해’다.
“원래 잠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루머가 많았던 분인데 이번에 루머가 아니라 팩트라는 걸 확인했죠. 출장 가서 그 분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잤다는 분도 있고, 해외 출장길에 비행기 안에서 크게 코를 골아 외국인 승객의 항의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거든요. 과장됐겠지 했는데 직접 겪어보니까 그게 아니에요. 부서장 지원업무라 바로 옆자리에 임시로 책상을 마련했는데 요새 귀마개라도 사올까 고민입니다. 대략 오후 2시 반을 넘어가면 슬슬 코를 골면서 잠을 청하는데 그러다 3시쯤 되면 사무실이 떠나가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러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네요.”
올해 초 물류회사에 입사한 H 씨(여·24)도 직속 상사를 보고 놀랐다. 대담한 걸 넘어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지난해부터 야간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해요. 사장님 마인드가 직장생활 하면서 공부한다는 걸 대단하게 생각하는지라 수업 있는 날 1시간 정도 이른 퇴근도 용인해주고 있죠. 근데 요즘 같아선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회사에서 묵인한 상황이래도 대놓고 대학원 공부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4월은 중간고사 기간이라 더 하더군요. 하루 종일 시험 준비만 합니다. 월급 받고 회사 다니면서 뭐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룰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죠.”
카리스마 없는 무능력한 상사도 부하직원의 눈에는 한심하게 비친다. 현재의 위치와 경력에 맞는 모습을 보여야하는데 오히려 아랫사람 눈치를 보거나 버릇없는 직원들의 행동에도 지적 없이 넘어가는 나약함이 때로 한심하게 느껴진다. 중소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L 씨(31)는 같은 부서의 상사를 보면 답답하다. 직급에 맞는 위엄 있는 모습도 보여야 할 텐데 매사에 나이 어린 부하 직원에게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전공 특성상 다른 직원들보단 작문 실력이 되는 편입니다. 이게 업무적으로 활용되면 다행인데 어이없게도 부하직원의 사적인 공부에 쓰이고 있네요. 경력은 오래됐지만 고졸로 입사한 다른 팀 직원이 있는데요, 이 사람이 야간 대학에 다니게 됐는데 리포트를 쓰려니 막막한 거죠. 그때부터 글 솜씨가 좋은 그 상사를 들볶기 시작하더군요. 슬쩍 상사를 불러내서 리포트 작성에 도움을 받아요. 상사가 과외선생도 아니고 그것도 업무시간에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무슨 꼬투리가 잡혔는지 기가 센 대리한테 한마디도 못하고 매번 불려가는 상사를 보면 좀 그러네요.”
의료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J 씨(30)도 같은 팀 부장만 보면 답답하다고 토로한다.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등 실무에 쓰이는 프로그램을 다룰 줄 몰라 무조건 출력해서 검토하고 수정할 부분은 펜으로 체크해 부하 직원에게 넘긴다고.
“하루는 메일로 받은, 1000장 넘는 문서를 무조건 종이로 봐야 한다면서 본인이 직접 출력하더군요. 종이가 자꾸 프린터에 걸려 다시 넣길 반복하면서 하루 종일 거기에 매달려 있더라고요. 다른 직원들은 프린터를 사용할 수 없어 다른 부서 프린터를 사용해야 했고요. 그런데 다음 날 다들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자료가 책자로 만들어져 택배로 도착했거든요. 부장이 받은 메일 마지막 부분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자세하게 체크하지 않고 무조건 출력해 버린 거죠. 이런 헛일을 여러 번 하면 좀 배우려고 해야 할 텐데 여전히 프린터를 끼고 사는 부장을 보면 죄송하지만 좀 한심하게 여겨집니다.”
회사에 ‘놀러오는’ 상사도 한심하기로 따지면 무능력한 상사 못지않다. 뼈 빠지게 일하는 부하직원 입장에서는 얄미운 생각까지 든다. 섬유업계의 A 씨(여·28)는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문득 팀장을 보면 어이가 없단다. 어김없이 인터넷 쇼핑 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습에 혀를 차게 된다.
“사장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있는 분이에요. 왜 안 잘리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을 정도죠.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영업을 뛰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를 잘 다루는 것도 아니거든요. 조용해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나 보면 항상 인터넷 쇼핑에 집중하고 있어요. 주로 건강식품이나 골프 관련 용품이죠. 회사를 왜 다니나 싶어요.”
기계장비 회사에서 일하는 P 씨(28)도 A 씨와 같은 심정이다. 부장만 보면 한심하면서 억울한 생각이 든다. 벽을 등진 요새 같은 자리에 앉아서 하루 종일 온라인 바둑게임만 두고 있단다.
“놀고 있는 모습이 눈엣가시 같아서 게임이 안 되게 차단을 해놨더니 히스테리가 심하더라고요. 그게 가까이 있는 저한테 온전히 와서 결국 다시 살짝 차단을 해제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심신이 좀 덜 괴롭더군요. 부장은 요즘도 변함없이 바둑게임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제가 보기엔 중독 같은데 부하직원 입장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한심한 눈길만 팍팍 보내고 있습니다.”
휴대폰 부품 회사에 근무하는 M 씨(33)는 현재 회사에도 남들이 ‘한심하다’고 말하는 상사가 있지만 생각이 조금 다르다. 업무에서 부하직원이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는 “사원이나 대리 직급의 직원들이 매달려도 해결 안 되던 사안이 그 ‘한심한’ 상사의 말 한마디나 전화 한 통으로 쉽게 처리될 수도 있다”며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M 씨의 말대로 한심한 상사들에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상사들이여, 기왕 하는 회사생활, 반면교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멘토가 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