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꾼 없이도 살만한 68세 선녀님의 삶과 꿈이 맞닿는 순간…늦은 게 어딨어, 지금이 한창인데
‘한창나이 선녀님’은 제목대로 강원도 삼척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한창 나이를 살고 있는 임선녀(68) 할머니의 삶을 따라간다. 첩첩이 굴곡진 강원도 산골 중에서도 산골.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광부들의 헤드 랜턴을 쓰고 길을 걸어야 하는 깡촌이다. 무섭지도 않은지 씩씩한 발걸음으로 도착한 곳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집이 있다. 백년가약을 약속했던 남편은 백년의 딱 절반인 50년을 채운 채 3년 전 세상을 떠나고 이곳엔 선녀 할머니만이 남았다.
나무꾼 없이 하늘 아래 세상을 홀로 살아야 하는 선녀 할머니의 삶은 슬픔에 몸을 온전히 맡길 여유도 없이 하루 24시간이 꽉 차도록 바쁘다. 커다란 솥에 팔팔 끓인 뒤 소담하게 담은 두부를 먹여 새끼를 낳은 소의 산후조리를 도와줘야 하고, 가지가 휠 정도로 가득 맺힌 감을 한 소쿠리 가득 따서 알알이 엮어낸 곶감도 처마마다 걸어놔야 한다.
들판에 풀어놓은 숫염소 한 마리가 윗집 할아버지네 마당까지 들어간 것을 붙잡아 오고, 비싼 콜택시를 불러 시내 한글학교까지 나갔다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고 나면 그때서야 숨 돌릴 틈이 아주 작게나마 생길 뿐이다. 그 틈바구니에서조차도 선생님이 내주신 덧셈뺄셈 숙제를 하다 보면 어느새 선녀 할머니의 하루는 저물어 버린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라 산 하나만 넘어 봤을 뿐, 열여덟 살에 시집와 시내를 제외하면 이 마을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선녀 할머니는 산골 처녀였다가 한 남자의 아내였고, 또 아이들의 엄마였기도 했다. 그렇게 70년 가까이 보내고 나니 임선녀로서의 온전한 삶을 챙겨본 적이 없었음을 막연하게 깨닫게 된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지내는 동안 꿈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알지 못한 채 시간만 무정하게 흘러갔다.
그런 선녀 할머니의 바쁜 일상에 또 다른 일과가 자리 잡았다. 일흔을 앞두고 처음으로 자신이 살 집을 새로 짓기 시작한 것. 장성해 독립한 아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 하지만 자녀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선녀 할머니의 뚝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도 죽기 전에 좋은 집에서 한 번 살아 봐야 될 것 아니냐” 선녀 할머니에게 ‘없었다가 있었던’ 꿈은 바로 이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축대 역할을 할 커다란 돌멩이들을 쌓아 올리고, 망치질부터 시멘트로 바닥을 다지는 일까지 어디 하나 선녀 할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생전 처음으로 오롯이 나만을 위해 힘을 쏟게 된 선녀 할머니의 손놀림과 발걸음에는 힘이 꽉 들어 차 있다. 당신 몸보다 커다란 포대를 등에 걸머지고 옮기면서도 지친 기색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선녀 할머니에게 있어 새 집을 짓는 일은 바쁘기만 했던 하루의 또 다른 일과가 아닌 당신의 꿈을 향한 첫 걸음마인 셈이다. '그래도 해야지'가 아닌 '그러니까 해야지'가 주는 힘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소박한 일상에 맞춰져 있던 이야기의 초점이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춰가는 집과 맞물리면서 관객들은 그 집이 완성되는 순간 선녀 할머니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너무 늦었다고, 그럴 시간과 돈이 어디 있냐고, 이젠 좀 쉬엄쉬엄 살라고. 내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언제든 내 삶과 내 꿈을 겹쳐두어도 괜찮다는 걸 선녀 할머니가 몸소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영화가 끝난 뒤 사진으로 등장하는 완성된 집 앞에 선 할머니의 얼굴엔 그런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가 담겨 있으니, 끝났다고 해서 빨리 자리를 뜨지말고 스태프롤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자.
‘한창나이 선녀님’을 제작한 원호연 감독은 휴먼 다큐멘터리만을 우직하게 파온 ‘한우물 장인’이다. KBS '인간극장'과 영화 '강선장' '선두' 등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그려온 그의 '한창나이 선녀님'은 올해 열린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람이 너무 좋아서 사람의 이야기로 호흡하고 싶었다는 원 감독은 임선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하늘과 맞닿은 듯이 아주 높은 곳에 위치한 외딴 마을에 임선녀 할머니는 혼자 소들을 키우고 농사도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에게서 ‘살아있음’을 느꼈고 그 에너지가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궁금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화의 엔딩 부분에 임선녀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모습을 통해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한 번씩 응원하고 싶다. 나를 응원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작동하게 만드는 영화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감독의 제작 의도처럼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망설임 없이 꿈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선녀 할머니의 일상은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흘려보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매너리즘에 빠져 사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도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인생이란 몇 년을 헤매더라도 꿈을 찾는 여정인 것은 아닐까. 조금 느리더라도, 남보다 작더라도 내 곁의 희망을 잡는 것이 꿈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너무 늦은 일은 없을 터다.
“꿈이요,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 한없이 무해한 강원도 산골의 그림 같은 풍경과 함께 한번쯤은 이렇게 묵묵히 공감할 수 있는 영화로 숨을 돌려도 괜찮지 않을까. 언제가 됐든 반드시 꿈을 찾을 당신의 삶을 응원하면서. 83분, 전체 관람가. 10월 20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
[배틀M] '랑종', 정도를 모르는 두 감독이 그린 공포의 최대치
온라인 기사 ( 2021.07.02 18:08 )
-
[배틀M] '뜨거운 피' 정우가 해냈다, 이게 바로 '조선 누아르'
온라인 기사 ( 2022.03.21 19:45 )
-
[배틀M] '모가디슈' 코로나19 속 개봉 강행한 자신감의 이유를 찾다
온라인 기사 ( 2021.07.22 18: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