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중립성 중시, 4년 임기 대부분 보장, ‘차기’는 대선 일정과 겹쳐…통화·재정정책 관련 정·관과 충돌 비일비재
타 부처 장관들과 다르게 정치인 출신 한은 총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조순·김중수 전 총재는 학자 출신이고, 이경식·전철환 전 총재는 관료 출신이다. 이성태 전 총재처럼 한은에서 내부 승진한 사례도 있다. 이주열 현 한은 총재 역시 1977년 한은에 입사해 2012~2013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고문과 연세대학교 특임교수를 맡았던 시절을 제외하면 한은에서 대부분 커리어를 보냈다. 다만 조순 전 총재는 훗날 서울시장을 역임했다.
한은 총재 인사청문회는 2012년 한국은행법이 개정되면서 시행됐다. 현재까지 인사청문회를 거친 한은 총재는 이주열 총재 한 명뿐이다. 이 총재는 2014년 인사청문회 당시 그의 자녀가 강원도 지역 학생을 위한 ‘강원 학사’에 들어가기 위해 할아버지가 있는 원주시로 일주일 동안 주소지를 이전한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 외에는 특별한 도덕적 흠결이 발견되지 않아 대부분 정책 질의가 오갔다.
한국은행법에 따르면 한은 총재는 국무회의 심의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한은 총재는 경제 정책과 연관이 깊은 만큼 청와대의 의중이 중요하게 반영된다. 그렇지만 한은 총재가 정권 교체 등 외부적 요인으로 사퇴하는 경우는 드물다. 1998년 이후 취임한 한은 총재는 모두 임기 4년을 무사히 마쳤고, 이주열 총재는 2018년 연임에도 성공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한 인사가 문재인 정부에서 연임한 사례는 흔치 않다.
한은은 중립성과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직이다. 청와대에서 한은 총재를 쉽게 교체하지 않는 이유도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한국은행법 제2조에는 “한은의 통화신용 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자율적으로 집행되도록 해야 한다”며 “한은의 자주성은 존중돼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청와대도 이주열 총재 연임을 결정할 당시 “한은의 중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며 “미국이나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서는 중앙은행 총재가 오래 재임하면서 통화정책을 안정적으로 펼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은의 중립성이 보장되다 보니 정치권이나 정부 부처와 충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은은 현재 전자금융거래법(전금법) 개정안을 놓고 금융위원회(금융위)와 갈등을 빚고 있다. 금융위가 추진 중인 전금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빅테크(대형 IT 기업)에서 이뤄진 개인 거래 내역을 금융결제원에 의무적으로 제공하고, 이와 관련해 금융결제원은 금융위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은 측은 한은의 고유 업무인 지급결제 업무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주열 총재는 지난 2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한국은행 업무보고에서 “(전금법은) 소비자보호 차원과 관련이 없다”며 “중앙은행 본연의 기능을 감독당국이 컨트롤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주열 총재와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지난 9월 회동을 가진 후 금융권에서는 전금법 관련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회동 후에도 한은과 금융위 모두 전금법에 대해 공식 입장은 내지 않고 있다.
기준금리 인상 관련해서도 정치권 일부와 충돌이 있었다. 이주열 총재는 지난 10월 12일 기자간담회에서 “경기 회복 흐름이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다음달 추가 금리 인상을 고려해도 좋다는 것이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다수의 의견”이라고 말했다. 이에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0월 1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금리 인상을 11월에 하겠다고 성급하게 시그널을 보낼 필요성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심지어 이주열 총재는 지난 10월 15일 국정감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전국민 기본대출 공약에 대해 “막대한 소요 재원과 부채를 더 늘려 상환 부담을 높이는 부작용도 충분히 수긍한다”고 말했다. 정부 인사가 대선 후보 공약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면 적지 않은 파장이 발생할 수 있다. 다만, 이 총재는 “소신 문제를 떠나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다”고 덧붙이기는 했다.
이주열 총재뿐 아니라 이전 한은 총재들도 정부 부처와 충돌하곤 했다. 일례로 김중수 전 한은 총재는 2010년 취임 후 한은의 직접 조사권을 요구했다. 김 전 총재는 2011년 ‘한국은행 국제 컨퍼런스’에서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에 대한 유동성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해당 금융기관을 직접 조사할 수 있는 일정한 권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은 “한은의 단독 조사권보다는 금융감독원(금감원)과 공동 조사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맞섰다. 이후 한은이 금감원에 공동 조사를 요구할 경우 금감원은 1개월 안에 응하도록 한국은행법이 개정됐다.
그렇다고 한은이 여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1995년 취임한 고 이경식 전 총재는 IMF(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98년 사퇴했다. 이 전 총재는 금융실명제 정착에 기여한 공이 있지만 1997년 12월 임창렬 당시 경제부총리와 IMF 구제금융 지원서에 서명함으로써 부정적인 여론도 상당하다. 이 전 총재는 지난 10월 1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한국은행법에 따르면 한은 총재는 한 차례만 연임이 가능하다. 이주열 총재는 이미 연임을 했으므로 2022년 4월에는 새로운 인물이 한은 총재에 취임하게 된다. 인사청문회를 감안하면 늦어도 2022년 3월에는 한은 총재를 지명해야 한다. 그렇지만 2022년 3월 9일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한은 총재 인선이 늦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은 총재 자리가 공석일 경우 이승헌 한은 부총재가 차기 총재 인선 전까지 한은을 이끌게 된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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