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 눈빛 쏘는 50대 악역에 팬들 ‘무진앓이’…“정재영과 박휘순 제 인생에 도움이 안돼요^^”
졸지에 죄 많은 남자가 된 박희순이 출연한 ‘마이 네임’은 아버지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범죄 조직과 경찰을 오가며 언더커버 역할을 하는 윤지우(한소희 분)의 이야기를 담은 액션 누아르 드라마다. 극 중 박희순은 지우가 속한 국내 최대 마약조직 동천파의 보스 최무진으로 분했다. 지우의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인 그는 지우에겐 아버지이자 스승, 그리고 숙명의 상대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줘 큰 호평을 받았다. 한소희라는 여성 배우 원톱 작품 속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는 완벽한 조연인 셈이다.
“제가 태생적으로 여성들을 보필하는 데 굉장한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그런 여성 서사에 감동을 많이 받고, 또 그들이 빛날 때 뒤에서 묵묵히 서포트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죠. 한소희 배우는 제가 생각한 것과 달리 의외로 굉장히 밝고 씩씩하고 선머슴아 같았어요(웃음). 의외로 또 되게 똑똑해요! 아, 의외라고 하면 안 되죠(웃음). 제 생각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자기 주관도 정말 뚜렷한 친구예요. 그래서 인간적으로 한소희라는 배우가 정말 좋더라고요. 그 힘든 현장을 버텨냈다는 것도, 동료로서 박수 쳐주고 싶어요.”
지우와 무진의 관계는 복잡하다. 세상에 남은 단 하나의 내 편이고,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이자 스승, 또 다른 아버지처럼 믿음과 정으로 쌓아 올렸지만, 그것이 사실은 모래 위에 세워진 탑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둘의 세계는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애증으로 치닫는 이들의 관계성을 두고 누군가는 “혹시 사랑은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바람을 보이기도 했지만 나이 차에 민감한 박희순은 딱 잘라 말했다. “그게 사랑이면, 저는 (경찰에) 잡혀 가요.”
“지우는 친구 딸이잖아요. 그것도 자기가 죽인 친구 딸. 사실은 끔찍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지우를 칼로 삼아서 복수를 하게 만들잖아요. 그런데 냉정한 무진의 마음에도 점차 흔들림이 생기고 파장이 생기는 그런 감정들이 있거든요. 그게 사랑이란 감정은 아닌데 관객들이 좀 다르게 해석하시나 봐요. 감독님이 제게 항상 디렉션을 주실 때 ‘멜로 눈빛 좀 하지마’ 그러셨거든요. 정통 멜로를 해본 놈도 아니고 멜로 눈빛이 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웃음). 그래서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연기하고 있는 거라고요!’라고 대꾸한 적이 있어요.”
그 멜로 눈빛이 젊은 세대들에게도 통해버렸다. 1020들을 설레게 하는 50대 아저씨의 영상과 이미지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퍼지는 것을 신기해하면서도 박희순은 우려가 먼저 된다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강조했다. “저 체포 당해요.” 인터뷰에서 이렇게 체포 걱정이 많이 나오는 건 또 처음이었다.
“참 걱정이 됩니다. 그게 다 불량 식품인데… 이런 식으로 좋아해주신다는 게 조금 걱정도 되면서 한편으론 기분이 좋기도 해요. 그게 박희순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최무진이란 캐릭터를 좋아해 주시는 거니까요(웃음). 내가 작품을 허투루 만들진 않았구나 하는 뿌듯함이 있죠. 하지만 조심해야 돼요. 제가 경찰에 잡혀가는 수가 있거든요. 부모님들의 이해와 지도편달, 그리고 보호가 필요해 보입니다.”
다행히 박희순을 경찰에 신고할 사람들은 없어 보였다. 현장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게 화기애애했고, 큰 형님이자 대선배인 박희순은 그들 사이에서 친근한 옆집 형·오빠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소희, 안보현(전필도 역), 이학주(정태주 역), 장률(도강재 역)과 함께 ‘독수리오형제’로 불렸다는 박희순은 현장 분위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 네 명은 정말 친남매처럼 잘 지내더라고요. 액션스쿨에서 3개월을 같이 보냈기 때문에 서로의 장단점, 민낯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몸을 부딪치는 액션을 연습하다 보면 서로 점잔 빼고 숨길 틈이 없거든요. 그래서 서로 응원하고 친남매처럼 장난도 치고 먹을 것 앞에서 싸우기도 하고 끈끈한 관계가 생겼죠. 사실 우리 독수리오형제가 다 재미있는데 그중 이학주 씨가(웃음), 특히 술 취한 현장에서 우리 사진은 아무 것도 없는데 학주는 동영상까지 있어요. 이걸 터뜨리면 얘는 끝입니다(웃음).”
“오빠는 50대에 잘될 줄 알았다”며 엄지를 치켜 올려준 아내 박예진의 말대로 ‘마이 네임’ 이후 박희순은 많은 것을 얻었다. 연차가 어린 배우들과의 좋은 인연부터 팬들의 사랑까지. 쏟아지는 행복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때쯤, 박희순에게 ‘입덕’한 팬들이 그의 ‘필모그래피 도장 깨기’에 들어갔다가 잘못해서 배우 정재영의 작품까지 보게 됐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나왔다. 정재영과 박희순은 닮은꼴 배우로 예전부터 유명했다. 심지어 활동 장르도 다른 개그맨 박휘순과 박희순을 헷갈려 “‘마이 네임’에 박휘순이 나왔냐?”며 의아해 하는 이들까지 나오며 대중들을 웃게 만들기도.
“제 인생에서 제일 도움 안 되는 사람들이 정재영하고 박휘순이에요(웃음). 사실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정재영하고 저를 구분 못하면 전 배우 인생을 헛산 거죠. 근데 정재영도 많이 늙었던데요, 이제 좀 구분이 되지 않으시나요(웃음)?”
이번에 입덕하게 된 박희순의 초보 팬들을 위해 정리하자면 박휘순 아닌 박희순은 1990년 연극배우로 데뷔해 이미 연극 무대에선 굵직한 족적을 남긴 배우다. 영화와 드라마로 판을 넓히기 시작하면서는 그에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안긴 영화 ‘세븐데이즈’를 비롯해 ‘작전’ ‘남한산성’ ‘1987’ ‘마녀’ ‘광대들: 풍문조작단’ 등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을 각인시켜 왔다. 이렇게 30년을 훌쩍 넘긴 배우 생활을 뒤돌아보며 박희순은 조금 더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하루하루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릴 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다 이길 수 있어, 내가 최고야!’ 하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떨어졌어요. 저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거든요. 그래서 더 겸손해지고 낮은 자세로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직업을 후회한 적은 없어요. 근데 다시 태어나면 안 할 것 같아요(웃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고 외로운 직업이라, 이번 생에서 맘껏 누리고 죽은 뒤에는 다른 걸 해야지….”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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