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 전두환 도와 전방 병력 동원 12·12 결정적 역할…북방외교·범죄전쟁 성과, 구속·특사 후 긴 요양·투병
노태우 씨는 1932년 8월 17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현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용진마을에서 태어났다. 대구공업중학교 재학 중 말라리아에 걸려 투병한 그는 이때부터 외과의사를 꿈꿨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동기부여를 통해 학업에 열의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인생경로는 1951년 정반대 방향으로 바뀐다.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0 대 1 경쟁률을 뚫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의사의 길이 아닌 군인의 길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됐다. 노 씨는 육사에 입학한 뒤 룸메이트와 함께 생활했다. 이 룸메이트가 바로 제5공화국 권력 정점에 선 전두환 씨였다. 노 씨는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육사 동기 전두환 씨를 보좌하며 육사 11기 동기생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전해진다. 노 씨와 전 씨는 이후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군부가 들어선 뒤 시간이 흘러 노 씨와 전 씨는 육군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때 육사 11기와 그 후배들을 중심으로 군내 사조직이 비밀리에 결성됐다. 바로 하나회다. 하나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은밀한 후원을 받으며 군내 세력을 확장했다. 선후배끼리 밀고 당기는 시스템 아래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진급가도를 쾌속질주했다.
하나회에서 의기투합한 룸메이트는 나란히 성공가도를 달렸다. 노 씨는 1974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다. 준장 진급 이후 제9공수여단장을 거친 그는 청와대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입성했다. 같은 시기 전두환 씨는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였다. 1979년 3월 노 씨는 청와대 경호실을 떠나 육군 제9보병사단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태 당시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이 사망하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체포되면서 대한민국의 ‘정보 파트’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됐다. 모든 정보력은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집중됐다. 당시 보안사령관은 전두환 씨였다. 정보를 틀어쥔 전 씨는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해 군내 권력을 장악하려는 작전을 기획한다. 12·12 군사반란이다.
이때 노 씨가 군사반란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9사단장이던 그는 군사반란 병력 동원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점 전방사단 편제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해 군사반란에 가담했다. 북한과 대치하는 병력을 서울 중심부로 빼면서 군사반란 키플레이어로 나선 셈이었다. 결국 12·12는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쿠데타 이후엔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 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제5공화국이 들어섰다.
군사반란 과정에서 ‘절친’의 작전을 적극적으로 도운 노 씨는 일약 정권 2인자이자 5공화국 후계자로 도약했다. 5공 초기 노 씨가 ‘유신 2인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찾아가 ‘2인자 처신 팁’을 전수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5공 출범 이후 노 씨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뒤 정치권에 입문했다. 2인자라기엔 다소 초라하다고 평가되는 직책들을 거쳤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정무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거쳤다.
내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 1985년 12대 총선서 전국구(현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직을 맡았다. 국회에서 신군부에 대한 반발 심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총알받이'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노 씨가 요직보다 험지 위주에 배치된 배경엔 ‘스리허(허화평·허문도·허삼수)’라는 5공 실세의 존재감이 있었다. 그러나 스리허는 시간이 흐르면서 차례로 실세의 수명을 다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도 유력한 5공 후계자로 지목됐지만, 민주화운동 진압에 따른 각종 논란이 불거진 상황에서 장세동에 대한 여론의 반발심리가 강했다. 후계자 하마평에 오른 나머지 인사들 역시 인지도나 존재감 측면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일련의 흐름이 노 씨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노 씨는 5공 후계자로 입지를 굳혔다.
노 씨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제안했다. 1987년 말 개헌이 실제로 이뤄지면서 한국 대통령제는 현행 5년 단임제로 자리 잡았다. 6·29 선언에 대해서는 기획 주체가 전두환이냐 노태우냐를 두고 여전히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노 씨는 이어진 13대 대선에서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권에 도전했다. 민주화운동 거목인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단일화에 합의하지 못했던 것도 노 씨 대선 승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 씨는 대선에서 828만 2738표(득표율 36.64%)를 받아 당선됐다. 역대 대선 최저 득표율 당선 기록이다.
노 씨는 집권 당시 북방정책으로 대 공산권 국가 외교정책에 대한 전환을 이뤘다. 그 외 각종 정책과 관련해서는 본인의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참모들 뜻에 맡기는 경청 리더십을 발휘했다. 정치권에선 노 씨 집권 시기를 두고 ‘회의가 많았던 시기’라는 회상이 나온다. 이런 성향 탓에 ‘물태우’, ‘큰바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분이 있는 5공을 청산하는 ‘5공 청산론’을 펼쳐 전두환 씨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강력범죄 감소에 공헌을 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1990년 1월 22일엔 ‘3당 합당’이라는 사상 초유의 정치 이벤트를 주선하기도 했다. 신군부 2인자 노태우, 민주화 거두 통일민주당 김영삼, 유신 2인자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이 손을 맞잡은 대형 사건이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3당 합당은 정치권의 무분별한 이합집산을 논할 때마다 거론되는 논란의 역사로 남았다.
퇴임 후인 1995년 10월 노 씨는 광주민주화운동 비하발언으로 논란 중심에 섰다.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렸던 경북고 동창회에 참석한 노 씨는 “(중국)문화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당했고, 엄청난 걸로 말하자면 우리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발언을 해 빈축을 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노 씨는 구속됐다. 김영삼 정부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진상 및 과거사 청산을 강력히 추진한 까닭이었다. 1997년 노 씨는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숙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동시에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됐다.
1997년 12월 20일 특별사면 이후 노 씨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었다. 2002년엔 전립선암 투병을 했다. 이후엔 소뇌위축증을 앓았고 암까지 재발해 자택에 요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엔 노 씨가 1997년 대법원 판결에 따른 추징금 납부를 완료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2020년 1월과 2021년 4월엔 노 씨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사실상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사실이 딸 소영 씨를 통해 전해졌다.
2021년 10월 26일 노 씨는 89세를 일기로 숨졌다. 1979년 10월 26일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뒤 정확히 42년이 지난 시점이다.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해 장례가 어떤 방식으로 치러질지 불명확했다. 그러던 10월 27일 문재인 정부는 국가장으로 결정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 ‘국가장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육사 룸메이트’로 인연이 시작돼 인생의 동반자이자 애증의 관계를 두루 거쳤던 전두환 씨는 노 씨를 조문하지 않았다. 전 씨의 부인 이순자 씨가 노 씨 빈소를 찾았다. 이 씨는 노 씨의 부인 김옥숙 씨와 10여 분간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정치적 논란의 소재가 된 노태우 씨의 생전 유언은 이랬다.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뤄지길 바란다.”
한 정치권 원로는 노태우 씨 인생 공과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신군부의 제5공화국 수립에 불법적인 방식으로 동조했고, 그로 인해 권력 중심에 등장한 것, 그리고 5공 당시 민주화 탄압에 동조한 것이 노 씨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다. 반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뒤 자기 손으로 5공 청산의 칼을 휘두른 것이 공으로 꼽힌다. 어렸을 적부터 친한 친구였던 전두환 씨와 밀착 거리에 따라 공로와 과오가 명확히 나뉘었다. 노 씨는 제5공화국의 부상과 몰락에 모두 지분이 있는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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