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키스 개막전 덜덜 떨리는 날씨에도 역투 인상적…전용 치료실 보유한 에이스지만 매사 솔선수범
장세홍 코치는 류현진과 2021시즌을 보낸 데 대해 ‘동고동락’이란 표현을 앞세운다. 그리고 한국 선수가 외국 무대에서 활약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류현진이란 자산 가치가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안겨주는지를 직접 보고 겪었다고 말한다. 10월 27일 광주광역시 한 음식점에서 장세홍 코치를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참고로 기사 구성을 장 코치의 시점으로 작성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양키스와의 개막전
현진이가 원정 개막전에 선발 투수로 내정된 건 3월이었다. 팀 에이스였기 때문에 개막전 선발은 당연했고, 현진이는 이 개막전을 위해 한국에서부터 불펜피칭을 소화한 것은 물론 시범경기 때는 투구수를 늘리며 몸을 만들었다. 나로선 류현진과 손을 잡고 처음 선을 보이는 경기라 경기 전날부터 크게 긴장이 됐다.
뉴욕 양키스 원정 개막전은 현지 시각으로 오후 1시 경기였다. 현진이와 나는 오전 9시 호텔을 출발해 야구장으로 향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한 나머지 문이 굳게 잠겨 있는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근처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4월 초순의 뉴욕 날씨는 매서웠다. 너무 추워서 입이 덜덜 떨릴 정도였는데 현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루틴대로 몸을 풀었다. 등판 전 불펜피칭을 앞두고 외야에서 캐치볼을 하는데 당시의 추위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날 정도다.
현진이는 그날 5⅓이닝 4피안타(1피홈런) 1볼넷 5탈삼진 2실점을 기록했다. 2-2 동점 상황에서 물러나 승패를 기록하진 않았고 실투 하나로 홈런을 맞아 2실점한 게 아쉬웠지만 에이스다운 역투를 펼쳤다.
손이 잘 펴지지 않을 정도로 추운 날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투구해가는 현진이를 보며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으로 선수를 존경할 수 있게 됐다는 점, 야구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됐다는 점, 그로 인해 현진이가 얼마나 영리한 선수인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날 상대팀 선발 투수는 천문학적인 몸값을 자랑하는 게릿 콜이었다. 양키스 팬들은 게릿 콜에게 뜨거운 응원을, 현진이 등판 때는 엄청난 야유를 퍼부었다. 현진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표정의 변화 없이 자신의 공을 던졌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제2의 류현진’이 나올 수 있을까. 메이저리그에서 에이스 대우를 받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공을 던질 수 있는 ‘제2의 류현진’이 탄생할까. 당연히 제2, 제3의 류현진이 나오길 간절히 바라지만 현진이처럼 마운드에서의 제구뿐만 아니라 자신을 강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선수는 나오기 어려울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투수 코치에게 영어로 어필한 류현진
한 시즌을 보내면서 여러 경기들이 기억에 남는데 그중 10월 4일(한국시각)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시즌 최종전은 팀의 명운이 걸린 경기라는 점에서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날 경기는 무조건 이겨야만 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 진출을 노리는 팀 상황에서 마지막 경기를 이겨야만 팀의 가을 야구 가능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현진이는 1, 2회 호투를 이어갔다. 3회 피홈런이 나왔지만 추가 실점하지 않고 이닝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9-1로 토론토가 리드한 상황에서 4회초 현진이가 세베리노의 타구에 오른쪽 허벅지를 맞는 부상이 발생했다. 타구가 시속 100마일(161km)이 넘었다. 감독과 트레이너가 급히 마운드로 향했는데 현진이는 큰 부상 아니라며 몸을 움직인 후 다시 투구를 이어갔고 다음 타자를 3루수 땅볼 처리 후 마운드를 내려올 수 있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현진이의 몸 상태를 체크해야만 했다. 그런데 무릎 쪽 뼈가 아니었고, 투구 동작에 필요한 근육을 피해 맞은 터라 다행히 다음 이닝에도 공을 던질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피트 워커 투수 코치는 워낙 중요한 경기다 보니 다른 투수로 교체할 의사를 내비쳤다. 그때 처음으로 현진이가 강하게 자신의 의사를 어필했다. 절대 안 된다고, 다시 올라가서 공 던지겠다고 말이다. 통역을 통하지 않고 투수 코치에게 직접 이야기한 것이다. 그만큼 그 경기는 팀도 중요했지만 현진이한테도 중요한 경기였다. 선발 투수로서 5회까진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정규시즌을 마무리하려는 현진이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악천후 속에도 야구를 하다니
5월 2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원정 경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잊지 못할 경기가 됐다. 경기를 앞두고 클리블랜드 홈구장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경기가 취소되지 않고 강행됐다. 미국에서 싸라기눈을 마주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 모든 선수들이 같은 환경에서 야구했지만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한테 강풍이 몰아치며 싸라기눈이 내리는 상황은 ‘힘들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 뒤따른다.
팀에서는 경기 앞두고 클리블랜드 홈구장과 차로 3, 4시간 거리에 있는 버펄로(당시 토론토 임시 홈구장)까지 달려가 두툼한 점퍼를 공수해왔는데 현진이는 경기 앞두고 그 점퍼가 도착하지 않아 얇은 훈련복만 입고 캐치볼을 했다. 당시 현진이는 악천후 속에서도 5이닝 6탈삼진 2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됐다.
하지만 그 경기 후 현진이의 신체 밸런스에 조금씩 문제가 생겼다. 올 시즌 후반기에 현진이를 힘들게 했던 체인지업의 제구와 투구 메커니즘의 변화가 왔던 계기가 바로 그 클리블랜드전 이후부터였다. 선수마다 구위를 회복하는 방법과 과정이 천차만별이다. 현진이도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투구 메커니즘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는데 선수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문제점이 노출됐다.
와인드업 할 때와 세트 포지션 할 때의 몸 상태 차이가 눈에 띄었는데 정작 선수 자신은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 투구 메커니즘을 회복하기 위해 이전의 투구폼으로 몸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선수가 상당히 힘들어 했다. 볼티모어와의 시즌 최종전은 현진이의 투구폼 관련 숙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
#타자 분석만큼은 알파고 능가할 정도
현진이가 경기 전날 타자 분석에 공을 들인다는 건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솔직히 그와 관련된 부분이 궁금했고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현진이는 경기 전날 전력분석팀에서 준 데이터를 갖고 일일이 영상을 체크한 후 투수 코치와 포수를 앉혀 놓고 자신이 다음 날 어떻게 경기를 운영해갈지 브리핑을 한다. 지금까지 현진이의 브리핑 후 투수 코치가 많은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항상 ‘나이스’ ‘베리 굿’이라는 칭찬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현진이의 경기 분석과 준비가 토론토 투수들 중 최고라고 말할 정도로 꼼꼼했고 치밀했다.
현진이의 경기 준비는 이후 팀 내 어린 투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듣기로는 피트 워커 투수 코치가 다른 투수들에게 현진이가 하는 분석 내용을 전하며 참고하라고 당부했다는 후문이다. 원래 안 하던 투수들이 경기 전날 분석지 들고 영상 보며 투수 코치와 미팅하는 모습은 어느 새 토론토에서 자연스런 장면이 됐다. 이건 정말 류현진 효과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4점 대 평균자책점, 류현진의 아쉬움
현진이는 팀 내 최고참 선수인 데다 에이스 대우를 받는다. 치료실도 현진이만 사용하는 전용이 있을 정도다. 살짝 비틀어서 말하면 기분 내키는 대로 해도 그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현진이는 매사에 솔선수범했다. 팀 내 규율을 지키는 데 철저했고 스태프들한테 예의를 갖춰 대했다. 구단의 모든 구성원들한테 존중받는 선수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쳤을 때는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올 시즌 31경기 등판해 169이닝 14승 10패 평균자책점 4.37을 기록했는데 4점대 평균자책점은 미국 진출 후 처음 기록한 숫자다. 후반기 저조한 성적으로 평균자책점 등 여러 기록들이 하향곡선을 탔고 그로 인해 에이스의 위치가 로비 레이한테로 옮겨갔지만 현진이는 시즌 마지막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투수조 최고참으로 선수들을 한데 모았고, 휴식 전날에는 자신의 방에 음식을 가득 시켜놓고 어린 선수들과 같이 식사했으며 뉴욕, LA 등 한국 음식점이 있는 지역에 가면 숯불 불고기, 치킨 등을 배달시켜 모든 선수들이 다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 현진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모든 선수들에게 존경받고 닮고 싶어 하는 선수가 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알기 때문이다.
올 시즌 현진이와의 동고동락은 내 인생에 큰 스토리를 남겼다. 현진이는 귀국 후 외부 일정 대신 가족들과 휴식을 취하며 벌써부터 훈련 프로그램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트레이닝 코치 입장에선 선수의 나이를 고려해 가급적 훈련을 늦게 시작하고 싶은데 ‘훈련 중독’인 현진이가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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