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예천군 신풍리 소박한 시골 마을에 낯선 풍경 하나가 눈에 띈다. 담벼락의 벽화를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조금은 특별한 미술관이다. 이곳에는 '할머니가 그렸습니까?'를 뜻하는 예천 방언 '할매가 그릿니껴?'라는 주제로 할머니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지난 2010년 신풍미술관에서 문을 연 할머니 그림 학교. 학교도 못 가고 논에서 평생을 보냈던 할머니들이 주름진 손으로 호미 대신 붓과 크레파스를 쥐었다. "우리 같은 밥버러지가 무슨 그림을 그려"라며 처음엔 간식 먹는 재미로 시작한 크레파스 칠에 점점 자신감이 붙자 할머니들은 가슴 속 꽁꽁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붓질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았다.
신풍리 미술관의 '몇시니껴?'전(展). 할머니들은 시계판 위에 당신의 즐거웠던 시간을 그렸다. 생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 시절 이이분 할머니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비 오는 날이라고 한다.
남편과 함께 산책도 하고 전도 부쳐 먹으며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홀로 남겨진 할머니의 그림 속에는 그날의 단비 같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번개댁 이이분 할머니(76)는 "버스나 차를 잘 그리면 좋을 텐데 차를 타고 영감하고 여행가는 게 소원인데 그때는 가난하고 하니 왜 그렇게 싸웠을꼬 요새 사람들 보면 서로 둘이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러면서 웃고 그러는데 우리는 그전에 왜 그러고 싸웠을꼬"라고 말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남편과 함께 고향 신풍리로 오게 되었다는 이성은 관장. 도시에서 학예사로 일하던 시간을 뒤로하고 작은 미술관을 짓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골 마을에 미술관을 지어서 뭐 하겠냐는 비아냥과 이방인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진심은 통하는 법. 그림으로 할머니들 마음속 응어리를 어루만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그림 학교는 어느새 마을에 없으면 안 될 존재로 자리 잡았다. 그림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울고 웃던 시간들,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밥을 나누며 11년 세월이 흘렀다.
신풍리 최강의 출장 벽화팀이 떴다. 오늘의 의뢰인은 동촌댁 이원주 할머니. 어제 까치 한 마리가 땅콩을 물고 나무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에 곧바로 벽화의 주제가 정해진다. 점심 한 끼면 마을 어디든 출동한다는 할머니 화가들. 일상 속 사소한 이야기들까지 그림이 된다. 낡고 허름했던 벽은 붓질 한 번에 알록달록한 작품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릴 곳 있는지 어디 다른 동네 좀 알아보소" 이제는 동네에 남은 벽이 없어 아쉬워하는 할머니들. 마을 곳곳에 할머니 화가들의 그림이 반짝인다.
파평 윤씨 집성촌인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 이곳 할머니들은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평생을 양반가 며느리로 살았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농촌 마을에서 모진 시집살이 견디며 입에 풀칠하랴 자식들 키우랴 평생을 바쳤다. 배움의 기회도 많지 않아 그림 같은 건 꿈도 못 꿨다는 그 시절.
고되고 서글펐던 기억도 돌아보니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며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이 되고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이제 할머니들은 한 장의 그림에 당신이 걸어온 한평생을 그려낸다.
화산댁 박정희 할머니(85)는 "여기 미술관 안 생깄으면 벌써 아팠을지도 몰라 난 미술관 힘으로 살아"라고 말했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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