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의점 슈퍼마켓에서 소화제, 감기약 등 가정상비약을 파는 약국 외 판매 여부가 다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사실 지지부진하던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2일 보건복지부 새해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미국도 슈퍼에서 의약품 판매를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며 관심을 나타낸 것. 그러자 그동안 뚜렷한 입장 발표를 하지 않던 보건복지부가 “구체적으로 논의할 예정이다”라고 언급했고, 기획재정부 역시 지난 4월 27일 “5월 내 구체적인 개선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수면 아래에 잠자고 있던 쟁점이 급물살을 타면서 의료계의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가정상비약 약국 외 판매 문제를 둘러싼 각 의료업계의 복잡한 속내를 따라가 봤다.
“한바탕 광고 전쟁이 벌어지겠죠.”
가정상비약 약국 외 판매 문제에 대해 한 중소제약업체 측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소비자가 진열대에서 약을 고르게 되면 약사의 결정권은 그만큼 축소된다. 이렇게 되면 제약사들은 당장 기존 영업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마케팅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접근해야 한다. 대형 제약사들은 인지도 높은 스타들을 동원한 물량 공세를 퍼붓겠지만 자금력이 달리는 중소제약사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대형 업체들에 밀릴 수밖에 없다.
한 중소제약회사 관계자는 “그동안 대중 광고에서 밀리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1차 구매자인 약사들을 타깃으로 한 영업활동에 주력해 왔다”며 “가뜩이나 리베이트 쌍벌제 강화 이후 영업활동이 위축된 상황에서 슈퍼마켓 주인을 상대로 영업을 할 수도 없고, 사실상 미디어 광고 이외에는 소비자들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어 아직은 막막한 상황이다”라고 토로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형 제약업체들이 이 정책을 환영하는 분위기만도 아니다. 대표적인 회사가 동아제약이다. 동아제약은 그동안 직접적인 영업활동보다는 매체 광고에 더 많은 공을 들여왔다. 그런데 제약사 간 광고 전쟁이 불붙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광고비를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늘어난 광고비가 수익으로 직결된다는 보장도 없다.
실제 지난해 동아제약의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동아제약은 판촉비가 예년보다 50억 원 이상 줄어들었다. 비용이 절감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대신 일반의약품 광고 투자비용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105억 원대를 돌파했고 매달 점진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은 최근 제약업계 모임에서 이 부분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 회장은 “박카스를 슈퍼에서도 팔 수 있다고 해서 매출에 큰 변화가 오리라 기대하긴 힘들다”며 약국 외 판매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박카스의 라이벌 제품이라 할 수 있는 비타500을 출시한 광동제약 역시 이번 변화가 반갑지만은 않다는 입장이다. 비타500은 지난 30여 년 동안 부동의 1위를 지켜왔던 박카스의 아성을 따라잡기 위해 판매활로를 새로 개척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드링크제를 일반 의약품이 아닌 편의점에서 판매가 가능한 식음료로 허가 받아 소비자들의 접근성을 높인 것. 만약 의약품으로 묶여 있던 다른 드링크제까지 편의점 진열대에 놓인다면 비타500만이 누렸던 이점이 사라지는 셈이다. 광동제약 측은 박카스와의 경쟁에 대해선 구체적인 의견표명을 꺼려하면서도 “의약품 판매에 대한 문제는 약사의 권한에 맡겨두는 것이 맞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제약업계 내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가정상비약 약국 외 판매 문제는 2009년 11월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 주최로 열린 ‘의약분야 선진화 공청회 개회과정’에서 약사회가 행사장을 점거해 파행된 후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말 이 대통령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시 논란에 불이 붙은 것.
그렇다면 가정상비약 판매 문제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 측은 약국이 문 닫은 시간에 소비자들이 겪는 불편을 해소하는 쪽으로 행정을 펴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관련 업계의 시각은 이와 사뭇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소속을 밝히길 꺼려한 제약업계 내부 관계자는 “제약회사 측은 약국 외 판매 논란에 대해 결과가 어떻든 제약회사들만 죽어날 수밖에 없는 ‘을사조약’이라 지칭한다”며 “구매자들이 슈퍼마켓에서 일반 의약품을 더 많이 찾는다면 약사들은 기존 거래량을 낮출 것이고, 반대로 약국에서 판매량이 더 많은 제품은 슈퍼마켓에서 거래량을 낮출 것이다”라고 말했다. 판매 루트만 복잡해질 뿐 판매 총량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란 의미다.
이 관계자는 “그간의 상황을 지켜보면 의료업계가 아닌 청와대 쪽에서 먼저 이 논란에 불을 지핀 셈인데 그 배경에 대해 갖가지 해석이 난무한다”며 “약국 외 판매시 당장 장담할 수 있는 부분은 제약사가 광고 집행규모를 늘릴 거란 점뿐이다. 그러다 보니 업계 내에서는 정부가 (종합편성채널들을 허가해놓고) 광고시장의 파이를 키우기 위해 의료계 내 광고경쟁을 유발하려는 의도 아니냐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와 관련한 또 다른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약사들은 어떤 입장일까. 약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인 대한약사협회는 원래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다가 최근 일정 부분 합의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약사협회 홍보팀 최헌수 부장은 “가정상비약이란 구분 자체가 모호한 상태에서 어떤 의약품까지를 약국 외 판매를 할 수 있게 허용할 것인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구체적인 논의가 되지 않은 상태다보니 이번 사안을 급박하게 몰고 가는 정부의 의도가 무엇인지 해석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반면 시민단체 측은 꾸준히 약국 외 판매를 주장하고 있다. 심야시간과 휴일에 긴급 환자들이 약을 구매하기 용이해진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경제정의실천연합 김태영 국장은 “현재 운영 중인 전국 심야응급약국은 모두 56곳이지만 지난 3일 동안 전국을 방문해 운영 여부를 확인한 결과 심야시간에 실제 운영되는 약국은 0.2%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가정상비약 약국 외 판매를 위한 시민연대’ 역시 “슈퍼나 편의점에서 의약품을 판매하게 되면 가격 경쟁이 유발되고 리베이트 비용이 줄어들어 자연스레 약값의 거품이 빠질 수 있다”는 논리로 적극 찬성하고 있다.
찬반이 크게 엇갈리는 상황이 다시 벌어지다 보니 당장 한 달 내 구체적인 개선안을 내놓겠다던 정부의 시간표도 미뤄질 가능성이 엿보인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