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십자가에는 버림받은 인간의 원형이 있다. 로마 병정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채찍으로 때렸고, 박해자들은 초라하게 사라져가는 예수를 맘껏 조롱했다. 평소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날을 감당하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인해 도망쳤다. 그 상황에서 옆구리를 찔리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혀 피범벅이 된 예수의 육체조차 점차로 예수를 떠나고 있다. 세상이 예수를 완전히 버렸고, 예수의 몸까지도 예수를 버리려 하고 있다. 모든 것에서 버림받은 그 상황의 절정이, 아마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은 아니었을까?
‘버림받음’은 인간의 보편적 문제다. 어느 날 갑자기 연인에게서, 가족에게서, 직장에서 버림받은 참을 수 없는 배신감에 총 맞은 것 같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은 낯설지 않다. 버림받음은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리면 ‘던져진’ 수동적 사건이다. 그 던져진 수동적 상황은 어쩌면 더 이상 ‘나’를 버린 그 대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나’를 버린 그 대상에 의존하여 살 필요가 없다는 생의 신호인지도 모른다.
예수에게서 배우고 싶다. 처참하게 버려지면서도 내가 너희를 위해 죽는다고, 나를 알아달라고 호소하지도 않았고, 억울하게 죽는 거 알기냐 하냐며 항변하지도 않았던 그 현자에게서. 십자가형이라는 어마어마한 고통 앞에서 예수는 동요하지도 않았고, 의기소침해져 우왕좌왕되지도 않았다. 예수는 스스로 자신을, 신의 각본 속에 들어있는 주연배우로 내세운 적도 없다.
예수는 저 기막히게 불행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래서 예수는 조용히,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는 거라고 기도하기만 했다. 예수의 매력은 그 엄청난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불행의 강을 건너고 침착하게 고통의 산을 넘었다는 데 있다. 그 힘으로 예수는 고통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변화시켰다.
그 예수를 통해 배운 게 있다. 어쩌면 불행은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르고 고통은 해로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삶은 단단해질 수 없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는 적어도, 고통을, 슬픔을, 불행을 모르게 해달라고 기도할 게 아니라 우리가 불행을 겪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를, 슬픔을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기원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거 같지 않은가.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