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오성과 눈빛 서사로 ‘낭만 vs 허무’ 명암 대비 호평…“캐릭터 몰입 ‘광속 탈출’ 악역 후유증 없어요~”
“사실 저는 액션을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웃음). 배우로서 장르에 대한 확장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마지막 장면에서의 민석은 액션을 한다기보단 그 상황을 가지고 이끌어가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거예요. 그렇기에 역동적이고 테크닉적인 화려함보단 울부짖는 맹수가 포획돼 가는 느낌으로 표현하려 했죠. 그런 연기가 제게 생소하진 않았고요, 그렇게 표현된 것에 만족하고 있어요.”
영화 ‘강릉’에서 장혁은 강릉 최대 리조트의 소유권을 갖기 위해 찾아온 서울 출신 건달 ‘민석’ 역을 맡았다. 조직원 간의 평화와 의리를 중요시하는 강릉 토박이 건달이자 리조트의 최대주주 ‘길석’(유오성 분)과 달리 민석은 눈앞에 보이는 목적을 위해서는 제 주변의 모든 이들을 거침없이 죽여 나가는 불도저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고 제 욕망을 위해 살인하는 쾌락 살인마는 또 아니고,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워 보이는 민석을 두고 장혁은 “현실에 발을 두고 있지 않은, 유령 같은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민석의 영혼은 아마도 처음에 그가 발견됐던 그 배 속에 맴돌고 있지 않았나 싶어요. 유령 같은 몸만 밖으로 나와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친구인 거죠. 그런 민석을 표현할 땐 많은 행동을 보여주기보단 그냥 당면한 과제에 초점을 두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초점이 흐려져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봄바람처럼 들어왔다가 겨울바람처럼 매섭게 나가고,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그런 캐릭터죠.”
유오성이 연기한 길석이 의리와 조직의 결속력을 중요시 여기던 구시대 한국의 건달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민석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면서 결코 채워지지 않을 허무를 원동력으로 삼아 움직이는 비교적 신세대의 건달을 그린다. 낭만과 허무라는 둘의 철저한 명암 대비가 이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장혁은 이런 민석의 모습을 연대감이 무너진 인간의 표상이라고 해석했다.
“민석은 제 인생에서 그저 홀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부재한 캐릭터로 표현돼요. 아마 민석의 그런 모습이 낭만에 대해 지금의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길석과 비교한다면 구시대와 신시대라기보단 이런 것 같아요. 더 이상 낭만을 바라보지 못하는 시점에서 길석을 만난 민석이 그에게서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며 그리움과 혼란을 겪게 되거든요. 민석에게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같다는 느낌을 받으시는 것도 아마 그런 환경 때문에 만들어진 느낌이지 않을까 싶죠.”
외적인 면에서도 길석과 민석의 대비는 흥미롭다. 길석은 딱 붙는 밝은 색상의 정장 재킷에 수묵화의 ‘삼묵법’이 떠오를 만큼 완벽하게 정돈된 헤어스타일, ‘건달 걸음걸이’라고 한다면 바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걷는 방식을 갖춘 모습을 취한다. 반면 민석은 비교적 후줄근한 차림새, 비슷한 머리를 한 남자 아이돌을 다섯 명 정도는 떠올릴 수 있는 소년 같은 헤어스타일과 어두운 색상의 옷으로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다. 각자 이미지에 맞게 길석은 묵직한 한 방 액션을 취하고, 민석은 날카로우면서 정돈되지 않은 난무 액션을 가져가는 식이다.
“처음에 민석의 의상 콘셉트는 다채로웠어요. 서울에서 온 건달이기 때문에 밝은 색으로 좀 화려하게 가자는 게 있었는데, 제가 감독님께 ‘단색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의상에 포커스가 빼앗기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민석은 황량한 모습으로, 눈을 중점적으로 볼 수 있는 캐릭터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몸무게도 감량해서 조금 처량하면서 처연한 느낌으로 갔던 기억이 나요. 악역이지만 사연이 있고 연민이 가는 그런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죠.”
캐릭터의 특성상 이전처럼 화려한 액션은 보여줄 수 없었다. ‘액션 면만 본다면 장혁을 쓰는 방식이 독특하다’는 평도 나왔다. 테크닉을 앞세웠던 이전의 액션 위주 작품들과 달리 이번 ‘강릉’에서는 ‘캐릭터 액션’ 그 자체에 방점을 준 덕이었다.
“‘강릉’에선 어떤 테크닉적인 액션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보단 이민석이란 인물이 앞으로 가고 싶어 하는 그런 간절함을 표현하기 위한 액션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사실 나이가 들긴 했죠(웃음). 그런데 액션을 하기엔 아직 끄떡없거든요, 지금도 복싱을 2시간씩 하고 있기도 하고요(웃음). 한편으론 액션 연기를 계속 해오다 보니 거기에 아주 조금은 밀도감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액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부분보다는 그 액션이 캐릭터를 통해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지에 대해 시각이 새롭게 생겼거든요. ”
아무래도 장혁이 맡은 캐릭터들 가운데 가장 빌런다운 빌런이다 보니 감정 연기에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도 생긴다. 흔히 악역을 연기하는 연기자는 캐릭터를 깊이 파고들었다가 빠져 나오기가 어려웠다는 말들을 한다. 관련 질문에 장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저는 전혀 안 그랬다”고 말했다.
“이상하죠(웃음). 저는 역할에 몰입했을 때 가지고 있는 그 캐릭터의 말투나 버릇 같은 게 작품이 끝나면 바로 없어져 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전 작품의 말투나 이런 것들을 저보고 다시 해 보라고 하면 못해요. 제가 요즘에 ‘추노’ 대길이 캐릭터를 성대모사 하는 영상을 봤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제가 그걸 따라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그게 기억이 안 나니까(웃음).”
작품에 대한 빠른 몰입과 탈출은 장혁으로 하여금 다작을 하도록 만드는 생존 기술(?) 같은 것이었다. 1997년 SBS 드라마 ‘모델’로 데뷔해 올해로 데뷔 25년차를 맞이하고 있는 그는 22편의 영화, 29편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그를 잊을 틈을 주지 않았다. 내년에도 KBS2 월화드라마 ‘붉은 단심’의 출연이 확정돼 있어 쉴 틈 없이 달릴 예정이다.
“스물한 살에 데뷔해서 어느덧 40대 중반이 됐는데 제 인생의 반 이상을 현장에 있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 감사하고, 즐거웠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제가 느낀 것, 경험한 것들이 20대에 비해 넓어졌어요. 깊이도 조금 더 깊어진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20대 초반에 대본 리딩을 하러 갔던 새벽 여의도의 찬 공기를 아직도 정확하게 느끼고 있어서 그때와 지금의 마음은 변함없이 똑같은 것 같아요. 현장에서 주는 그런 흥미로움이 아직도 저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고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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