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순방 기간 당·정·청과 상의 없이 ‘주4일제’ 등 이슈파이팅…차별화와 원팀 사이 딜레마 빠질 수도
“기억하는가. 해외 순방 잔혹사를.” 여의도엔 해외 순방 징크스라는 게 있다. 대통령이 국내 자리를 비운 사이 각종 사건·사고가 발생, ‘순방 컨벤션효과(정치적 이벤트 이후 지지도가 상승하는 현상)’를 갉아먹는 것을 지칭한다. 외부에서 발생한 대형사건 등이 대통령 순방 효과를 짓누를 수도 있지만, 정치권이 주목하는 것은 내부 변수다. 여의도 정치권에선 차기 권력을 둘러싼 내부 권력암투, 서초동에선 검찰발 정치개입 등이 대표적인 내부 변수로 꼽힌다.
과거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외 순방 징크스 대명사로 불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기 1년 차인 2013년 9월 러시아·베트남 방문 때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 파문에 휩싸였다. 공문서위조 의혹에 휘말린 박종길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물러난 것도 이때다. 한 달 뒤엔 국가정보원(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한 검찰의 ‘셀프 감찰’이 정국을 뒤덮었다.
야권 한 전략통은 “대통령 해외 순방 땐 내부 변수나 외부 변수가 빠르게 움직이기 마련”이라고 했다. 해외 순방 징크스가 내부 권력투쟁과도 무관치 않다는 얘기다. 여의도 복수 인사들도 “내부 투쟁 관점에선 사안의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반대편을 치는 정보가 ‘왜, 지금’ 외부로 흘러나왔는지”라며 “누군가 고의로 흘렸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 정부 들어선 검찰이 문재인 대통령 순방 기간 권력 중심부를 쳤다. 검찰은 2019년 9월 23일 검찰개혁의 상징인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의 자택을 ‘11시간’이나 압수수색했다. 문 대통령이 유엔 총회와 한·미 정상회담 참석차 미국 뉴욕으로 출국한 지 하루 만에 현직 법무부 장관 자택을 뒤진 셈이다.
노영민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검찰 압수수색 직전 열린 청와대 현안점검회의에서 관련 언급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핵심 라인도 검찰 움직임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읽혔다. 당에선 “검찰이 먼지털이식 수사를 했다(이해찬 당시 대표)” 등의 격앙된 반응이 쏟아졌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하필 대통령 없을 때…”라는 불편한 기색이 감지됐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비슷한 기류가 돌았다. 여의도에선 문 대통령의 유럽 순방(10월 28일∼11월 5일) 직전, 여러 풍문이 돌았다. “검찰과 여권 내부를 예의주시하라”며 권력암투의 진원지까지 구체적으로 찍은 이들도 있었다. 특히 친문(친문재인) 적자와 거리가 먼 여권 비주류가 본선행을 확정 짓자, 내부 권력투쟁과 검찰발 풍문이 끊이지 않았다.
당 내부에선 ‘이재명 흔들기’가, 당 외부에선 ‘검찰발 수사’가 대선 한복판으로 소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까지 나왔다. 야권 일부 인사들도 “문 대통령 유럽 순방 기간에 여권 내부 권력구도를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발 후보 교체론의 불씨가 되살아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이재명 후보가 여권 내부 우려에도 당·정·청과 엇박자를 내는 정책에 드라이브를 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여의도에선 이 후보가 정면 돌파를 시도하자 “특유의 직진 본능으로 국면전환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되치기를 당하기 전에 스스로 업어치기를 시도했다는 뜻이다.
이재명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 유럽 순방 기간 ‘주 4일제’와 ‘음식점 총량제’ 이슈를 꺼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즉각 “드디어 아무 말 대잔치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고 혹평했다. 야권 인사들도 “이재명 정책의 가면을 찢어야 한다”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산업계에서도 주 4일제에 대해 “시기상조”라고 우려했다.
주 4일제 등을 고리로 이슈 파이팅에 성공한 이 후보는 이후 최대 50만 원의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암호화폐 과세 유예, 개발이익 공공환수제 등 부동산개혁 등을 밀어붙였다. 김부겸 국무총리조차 “(긴급재난지원금을 줄) 여력이 없다”고 불편한 기색을 비쳤지만 이 후보는 “국가부채 비율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라고 일축했다.
이재명 후보는 정책 이슈몰이 과정에서 여권 수뇌부와 상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정청 갈등 불씨를 알고도 메가톤급 이슈를 ‘4개(주4일제·음식점 총량제·긴급재난지원금·암호화폐)’나 던진 것이다. 민주당 전략 파트를 맡은 실무진 사이에선 “당정 갈등의 신호탄을 이 후보 스스로 쐈다”며 “중도층이 이탈하면 어쩔 것이냐”는 불만이 쏟아졌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이재명발 긴급재난지원금과 관련해 “그건 나중에”라고 즉답을 피한 것이나, 박완주 정책위의장이 “(난 답변) 자판기가 아니다. 시기와 규모를 쓰면 다 오보”라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것도 이런 기류의 연장선이다. 민주당 수도권 중진 의원도 “당과 논의하고 발표해야 하지 않나”라고 했다.
일각에선 이 후보 측이 가상자산감독원 설치 공약까지 내놓자, “꺼낼 수 있는 국면전환 카드를 다 꺼낸 것”이란 말까지 흘러나왔다. 애초 이재명 캠프 정책 실무라인에선 이 후보가 지난 5월 암호화폐 과세 유예를 언급한 직후 “민감한 문제에 대해선 되도록 발언을 삼가자”라는 기류가 형성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관계자는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은 제시할 수 있어도 가상자산 관련 정책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 후보의 약한 고리인 2030세대가 민감한 암호화폐 정책을 섣불리 손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 후보가 2030세대가 원하는 암호화폐 과세 유예 문제 등을 공론화한 것은 그만큼 위기의식이 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후보의 승부수는 결과적으로 대장동 사태로 확전된 후보 교체론의 예봉을 꺾은 결과로 이어졌다.
이재명발 직진 본능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11월 2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경기장 케이스포(KSPO)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이재명 정부’를 7차례나 외쳤다. 한 달 전인 10월 10일 대선 후보 수락연설 당시 ‘이재명 정부’를 한 차례 언급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진보진영 금기어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소환했다. 박 전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를 언급, “탈탄소 시대를 질주하는 에너지 고속도로를 깔겠다”고 약속했다.
야당 관계자들은 “문 대통령과 차별화를 하겠다는 선언”이라고 했다. 특히 이 후보는 이 자리에서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부동산값 폭등에 대해 ‘대국민 사과’도 했다. 그는 “부동산 투기를 막지 못해 허탈감과 좌절을 안겨드렸다”며 “이재명 정부에서는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 측근은 “부동산 대개혁에 명운을 걸겠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재명발 이슈몰이는 단번에 정국 블랙홀로 격상했다. 그사이 검찰은 대장동 의혹 핵심인 ‘김만배·남욱·정민용 동시 구속영장 청구(11월 1일)→성남시청 추가 압수수색(11월 3일)’ 등의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지만, 이재명발 이슈몰이에 사실상 묻혔다. 여권 내부에선 “시간이 지날수록 검찰 내부 움직임도 둔화되지 않겠느냐”라는 전망이 많다. 대장동 의혹에서 이 후보의 아킬레스건은 배임 하나인데, 검찰 수사가 여당 대선 후보에게 향할지 미지수라는 것이다.
검찰은 이 후보 배임 혐의에 대해 “결론 내린 것은 없다”면서도 배임 피해자를 성남도시개발공사로 한정했다. 법조계는 유동규 배임과 이재명 배임을 분리한 것을 놓고 사실상 ‘꼬리 자르기’에서 사건이 마무리될 수 있다고 점친다. 민주당 한 경제통은 “어떤 사건이든 배임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검찰 의지에 달렸다”고 말했다. 여권 내부에도 검찰 칼끝이 이 후보에게 향하겠느냐는 관측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재명 딜레마’다. 이 후보의 본선 초반 선거전략 콘셉트는 차별화다. 그 신호탄은 현재 권력(문 대통령)이 부재인 상황에서 발발했다. 원맨쇼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로 읽힌다. 하지만 귀국한 문 대통령이 이 후보의 정책 일부에 대해 제동을 걸거나, 김부겸 국무총리나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진다. 이 후보가 ‘중도를 잡자니 원팀이 분열되고’ ‘친문에 구애하자니 중도가 이탈하는’ 딜레마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본선 길목에서 되레 이 후보의 의혹이 커진다면, 반이재명발 후보 교체론이 재부상할 수도 있다. 대장동 특별검사제(특검)에 대한 국민적 요구는 높다. 변호사비 대납 의혹도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본선 검증 과정에선 되치기를 피한 이 후보가 업어치기에 또다시 성공할지 예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민주당 한 재선 의원은 말했다.
“이 후보의 아킬레스건은 ‘이적이(이재명의 적은 이재명)’다.”
윤지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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