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들은 저마다 자기가 적격이라 하고 각 진영에서는 자기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고 확신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하느님도 모를 것 같다. 이 전쟁 같은 대선판에서 누가 이 나라를 이끌 대통령이 될지. 싸움이 점점 치열해지는 이유다.
이번 선거에서는 제3의 변수가 눈에 띈다. 심상정, 안철수, 김동연 후보다. 이들이 끝까지 뛸까. 이들 중 끝까지 뛰는 누군가가 적어도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를 쓰러뜨리거나 누군가에게 운을 보태는 영향력은 상당할 것 같다.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의 차이가 많지만 투표행태에서도 확연히 차이나는 것이 있다. 우리 세대는 사표(死票)를 만드는 일을 어리석음으로 여겼다. 이념적으로 아무리 동조한다 해도, 가능성이 없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일은 소중한 한 표를 사표 만드는 일로, 비웃음을 사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이 없으면 차선을,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를 똑똑한 논리로 여겼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는 다른 것 같다. 그들 중엔 다른 고려 없이 마음에 드는 후보에 표를 던지는 이들이 제법 많다. 당장 내 표가 사표가 되는 것이 뻔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변화다. 그런 그들에겐 사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차선을 선택하는 논리는 똑똑한 논리가 아니라 성급한 논리다.
지금 지지도가 높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당당히 투표해서 사람도 키우고 진짜 민심의 싹도 키운다는 믿음인 것이다. ‘아, 그렇구나’ 수긍하며 그 정신에 동조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이렇게 젊은 세대들이 나이든 세대를 견인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정신에 힘입어 제3의 변수들이 힘을 발휘하며 다양한 색깔의 정치인들이 배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후보에서 밀려난 정치인 중에 독특한 색깔의 정치인은 이낙연 전 국무총리다. 그를 유심히 봤던 이유는 그때그때 그가 보여준 정치적인 판단의 방향 때문이 아니라 그가 구사하는 언어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자기만의 언어가 있다. 그 언어는 삶의 태도에서 오는 것 같다. 선대위 출범식에서도 그의 언어감각은 돋보였다.
“여야 정당들은 그들만의 성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이 국민의 눈에는 오만과 독선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안에 머문다고 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나’를 만나는 시간, 자기성찰의 시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이 말이 마음에 박혔다.
“우리 민주당이 야당들보다 더 겸손해지기를 바랍니다.”
겸손, 어렵다. 겸손을 매너로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많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많이 가진 사람이 평화로울 때 매너로서 가지고 있는 ‘겸손’은 겸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겸손’은 겸손의 외양을 입은 교만이다.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넌 겸손하겠구나, 하고 되물으면 나도 할 말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이 중요한 것은 겸손 없이 진실에 이르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겸손은 무조건 낮추기, 무조건 머리 숙이기가 아니다. 겸손은 체험에서 온다. 예상치 못한 일을 숱하게 경험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상황을 탓하고 타인을 비난했나. 그러면서 생긴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해 방어자세가 일상인 불안한 사람에게는 겸손이 자리 잡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겸손은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오만을 내려놓을 때 생긴다고. 자기 뜻만이 옳다고 믿는 오만한 사람은 자기 뜻을 거스르는 상황과 사람에 대해 잔인하다. 그런 이는 늘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다. 그 오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다른 사람이 보이고, 화합이 보이고, 진실이 보이고, 평화롭게 사라질 수 있는 힘까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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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