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코 상왕비 실어증·마사코 왕비 적응장애·마코 공주 PTSD 진단…“여성 위상 여전히 봉건시대 자취”
최근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남성 왕족에게는 너그러운 반면, 여성 왕족에게는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매체는 “일본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이 가장 힘든 장소 중 하나가 왕실”이라고 덧붙였다.
일례로 1990년대 초 당시 왕비였던 미치코는 자신을 비난하는 기사 때문에 실어증 증세를 보인 적 있다. 며느리인 마사코 현 왕비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힘겨운 궁중생활을 해야만 했고, 그 결과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미치코 상왕비의 손녀 마코 공주가 ‘복잡성 PTSD(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녀의 결혼에 대한 중상비방을 장기적으로 경험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지난 10월 26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마코 공주(30)와 고무로 게이(30)가 혼인신고를 마쳤다. 두 사람은 반대 여론에 부딪쳐 이례적으로 두 번이나 결혼을 연기한 바 있다. 4년 전 마코 공주가 평범한 사무직인 고무로와 약혼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축복의 목소리가 높았다. “소탈한 마코 공주답다”는 것이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한 매체 보도가 나오면서 여론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주간여성’은 2017년 12월 26일호에서 “고무로의 어머니가 과거 교제한 남성으로부터 돈 400만 엔(약 4100만 원)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공짜로 알고 받았다”는 고무로 측과 “엄연히 빌려준 돈”이라며 펄쩍 뛰는 전 애인 측의 설전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후 “고무로 모친이 폭력단과 관련이 있다” “정체가 의심스러운 신흥종교 신자다” “고무로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분신자살했고,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도 아버지의 자살 후 얼마 안 돼 사망했다” 등등 온갖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소동은 더욱 커졌고, 비난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온라인 매체 ‘아에라닷컴’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1%가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할 마음이 없다’고 답했을 정도다.
일각에서는 “마코 공주가 결혼 시 받는 일시금(전 왕족의 생활정착금)을 노리고 고무로가 접근한 것 아니냐”는 억측까지 제기됐다. 공주의 일시금은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6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마코 공주의 결심은 굳건했다. 결국 아버지 후미히토 왕세제는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왕세제는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고 기뻐하는 상황은 아니다”며 “아마 딸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년간 구설에 시달리던 마코 공주는 쓸쓸히 왕실을 떠나게 됐다. 여론을 의식해 정식 결혼식 행사 없이 혼인신고만 제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실에서 주는 일시금도 받지 않았다. 현지 언론에 의하면 “두 사람은 미국 뉴욕 임대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할 예정으로 마코가 맞벌이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인과 결혼함에 따라 왕족에서 평민 신분으로 바뀐 마코는 기자회견에서 “해외생활은 자신이 원했던 것”이라며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에서 따뜻한 가정을 이뤄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마코의 결혼 소동은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남편 고무로가 최근 미국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서 낙방한 사실이 전해졌기 때문. 이는 일본 언론들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고무로의 진짜 실력, 불합격은 당연했다(‘주간문춘’ 11월 11일호)” “‘고무로 연속극’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전 국민을 속인 특집판 ‘불합격’ 마코 전 공주의 비극(‘주간신조’ 11월 11일호)” 등등 관련 보도가 또다시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고무로는 뉴욕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조수 격인 법률사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내년 2월에 변호사 시험을 다시 볼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 주간 ‘여성세븐’은 “변호사의 연수입은 2000만 엔이 넘지만 법률 조수는 600만 엔 정도”라며 “물가와 집세가 비싼 뉴욕에서 신혼부부가 어려운 출발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마코 전 공주를 향한 선정적인 보도는 정신건강 문제로 고통 받았던 일본 왕실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령 마사코 왕비는 ‘왕자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갖은 괴롭힘을 당했다. 미국 하버드대학을 나온 마사코 왕비는 결혼 전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재원이었다. 성격도 매우 활달하고 자유분방했다고 한다. 남자보다 일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나루히토 일왕이 “나를 도와 왕실 외교를 할 수 없을까요?”라며 청혼했다는 일화는 익히 유명하다.
하지만 일본 왕실은 ‘화려한 새장’과도 같았다. 마사코의 임신이 늦어지자 ‘불임 왕세자비’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고, 2004년 마사코는 ‘스트레스성 적응장애’ 진단을 받게 된다. 병명이 발표된 후에도 공식석상에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꾀병’ ‘오만방자한 왕세자비’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치코 상왕비를 들 수 있다. 미치코는 1959년 당시 왕세자였던 아키히토와 결혼했다. 일본 왕실 최초의 평민 출신 왕세자비였다. 하지만,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왕실 내에서는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급기야 자신을 비난하는 기사 때문에 몇 달 간 실어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정신과전문의 가야마 리카 릿쿄대학 교수는 “일본 왕실에서 여성은 국왕이 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왕족이 받는 비판은 왕위계승자인 남성 왕족보다 훨씬 심하다”고 지적한다. “왕족으로서의 공무는 물론이요, 아름다운 패션을 겸비해야 하며, 결혼 후에는 아이를 낳는 것이 목적이 된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좋은 어머니인가, 시어머니와의 사이는 원만한가, 남편을 제대로 떠받치고 있는가 등등 많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면서 “이와 달리 왕실의 남성은 엄격한 잣대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해외 언론들도 이번 마코 공주의 결혼 소식을 전하며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특히 일본 왕실에서는 여성의 왕위계승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 여성 왕족이 평민과 결혼하면 왕족 신분을 잃게 된다는 점을 놀라워했다. 일례로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세계경제포럼의 남녀평등 조사에서 일본은 156개국 중 120위였다”고 보도했다. “비단 왕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일본 사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성 평등이 뒤쳐져 있다”는 분석이다.
‘AP통신’은 “일본 공주가 캠퍼스커플로 만난 일반인과 결혼해 왕족 신분을 잃었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뉴욕에 도착한 고무로와 마코의 모습을 소개하며 “신혼부부가 자신들의 로맨스를 비난한 자국을 떠나 행복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무로가 사법시험에 불합격한 사실이 일본 언론의 새로운 비난거리가 됐다”는 설명과 함께 “일본은 여러 면에서 근대화했지만 가족 간의 가치관과 여성의 위상은 여전히 봉건시대의 자취가 짙다”고 평가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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