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이슬이여, 감자 밭에 앉은 은하수’ 감자 꽃잎에 맺힌 이슬방울의 반짝이는 달빛에서 우주를 본 일본인의 극적인 미감을 표현한 하이쿠다.
우리 주변의 사소해 보이는 사물에 눈높이를 맞추면 큰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주는 말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줄여서 ‘소확행’이라는 표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말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A small, good thing’에서 따온 신조어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단순한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정신적 다이어트 현상으로 보인다.
예술에서도 이런 흐름이 두드러진다. 최근 추상 회화의 부활이 대표적인 경우다. 사람들은 이제는 예술에서 특별한 의미나 거창한 사상 혹은 이념 같은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인테리어 같은 장식성에서 정신적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공기처럼 늘 곁에서 있으면서 위안이 되는 예술 본래의 기능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다.
‘짐노페디’라는 곡이 있다. 음악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선율이다. 20세기 초 유럽 아방가르드 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에릭 사티가 만들었다. 이 곡은 그의 작품 중에서 대중적 지지도가 가장 높은 음악이다.
제목은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아이들’을 뜻한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행했던 아폴론을 위한 축제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티는 이런 뜻을 이 곡에다 담지 않았다. 단지 제목이 그럴듯해 썼다고 했지만, 순수하고도 단순한 곡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사티는 수많은 기행과 혁신적 아이디어로 20세기 초 음악가뿐 아니라 젊은 화가와 문학가들에게도 멘토 역할로 통할만큼 전위적인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악을 ‘가구 음악‘이라고 부르며 삶의 영역에서 인테리어처럼 배경이 되기를 바랐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사티의 음악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이상민의 회화에서도 사티의 생각이 묻어나온다. 그는 흔한 풍경을 그린다.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중간색조로 그려내기 때문에 눈을 끌지도 않는다. 인테리어 배경 같은 분위기의 그림이다. 작가는 이런 분위기의 회화가 자신의 성품과 꼭 맞는다고 말한다.
정신적 방황과 기법의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세상에서 그가 찾아낸 것은 편안함이다. 그래서 이상민 회화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예술의 본래 기능에 충실하려는 작가의 깨달음이 일궈낸 결실이다.
그런데 그의 풍경이 평범하지는 않다. 많은 연구 끝에 얻어낸 치밀한 구성 방법과 중간 톤의 색채의 조화로 이루어진 이상민식 회화 언어 때문이다. 평범한 풍경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지만 편안함을 주는 그의 그림을 ‘가구 회화‘라 부르고 싶다.
전준엽 화가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