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판을 받고 있는 20대 초반 여성 이 아무개 씨가 털어 놓은 얘기다. 이 씨는 검찰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원 일부로 인정돼 사기·사문서위조·위조사문서행사 혐의로 지난 7월 기소돼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 씨는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누구나 걸려들 수 있다는 것만은 알아달라”며 감형을 호소하고 있다.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이 변화하고 있다. 피해자들에게 돈을 받아 전달하는 현금 인출책을 세상 물정에 밝지 않은 젊은 층이나 중장년층에게 단기 알바 등으로 속여 시킨 후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인출책은 세상과 접점이 생기면서 CCTV 등에 얼굴이 비쳐 쉽게 잡히기 때문에 이 같은 방법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걸려든 이 씨 사연은 이랬다.
이 씨는 이혼 가정에서 자라 홀로 어머니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다니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 씨는 어머니와 거주하던 집에서 월세를 내지 못하다 결국 보증금까지 다 삭감됐다. 이 씨는 집에서 쫓겨날 상황까지 몰렸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소액 대출을 알아보게 됐다.
그런 이 씨 눈에 마침 페이스북에서 ‘소액대출’ ‘급전대출’ 문구의 광고를 접하게 됐다. 사회 초년생인 이 씨는 급한 마음에 이곳에서라도 대출을 받기 위해 연락을 하게 됐다. 해당 대출회사는 “우리는 ‘M 어패럴’이라는 상호의 대출 캐피탈 회사”라면서 전화가 오게 됐다. 이 회사는 이 씨에게 ‘대출에 필요하다’며 인적사항과 당시 금액이 얼마나 필요한지 물어봤다.
잠시 뒤 M 사 대출 담당이라는 김 아무개 팀장이 이 씨에게 전화했다. 김 팀장은 “이 씨는 아쉽게도 대출대상자가 아니다”라면서 “혹시 인적사항에 휴직 중이라고 적었던데, 이 씨 집 근처에서 직원을 채용 중인데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고 물었다. 이 씨가 “업무가 뭐냐?”고 물으니 김 팀장은 “대출이나 추심을 하는 캐피탈 회사인데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직원이 부족하다. 서류를 전달하거나 대출금을 회수해 회사 통장으로 입금하는 간단한 업무이고 출퇴근도 자유롭고 건당 20만 원을 당일 지급한다”고 설명했다.
일을 하기로 한 이 씨에게 김 팀장은 “내가 알려주는 주소에 차를 타고 가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이 씨는 불러준 주소로 갔다. 김 팀장은 “만날 고객은 M 사에서 대출을 이미 받았고 추가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추가 대출을 위해서는 일단 상환을 해야 한다. 고객에게 돈을 받아 회사 통장에 입금시키고 상환증명서를 전달하라”고 말했다.
이 씨는 김 팀장이 시키는 대로 근처 PC방에서 상환증명서를 출력해 돈을 받은 뒤 증명서를 고객에게 줬다. 고객에게 받은 돈은 그대로 김 팀장이 불러준 통장에 입금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곧바로 경찰에서 이 씨에게 ‘범죄에 연루됐다’는 연락이 왔다. 가뜩이나 가게 사정 상 궁지에 몰려 있던 이 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 씨는 “정말 단기 알바라고 생각하고 일했다. 김 팀장이라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고 돈을 받아 그대로 전달했다. 단 한 번 가담했고 내가 받은 돈은 알바비라고 했던 20만 원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이 씨는 “보이스피싱 알바는 누구나 걸려들 수 있는 신종 사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고리 대출이 필요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접근한다”면서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했고 어리석어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히게 됐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 진지하게 반성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씨는 재판을 받고 있지만 정작 이 씨를 범죄로 몰아넣었던 김 팀장은 현재 잡히지 않은 상황이다. 수사기관은 김 팀장을 추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보이스피싱 인출책 검거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보이스피싱 인출책 97%가 온라인 구인광고를 통해 가담했다고 한다. 대출 알선 등 어려운 사람을 노리는 등 온라인 구인광고를 통해 범죄 구렁텅이로 빠진 것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년이나 중장년층이 단기 아르바이트로 알고 뛰어들었을 때 보이스피싱 조직일 경우 그 결과가 상상하지 못할 파국으로 흐를 수 있다”면서 “요즘은 아르바이트 하나도 잘 알아봐야 한다.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해 범죄단체조직죄를 통해 엄하게 처벌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잘못하다가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공범이 돼 범죄단체 조직으로 처벌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사 경찰이 직접 가담한 황당 사례도
지난 10월 보이스피싱 원조 격으로 알려진 ‘김미영 팀장’을 사칭했던 조직이 필리핀에서 붙잡혔다. 이 조직 총책은 수백억 원이 넘는 돈을 가로챘다고 알려졌다. 김미영 팀장 조직 총책의 정체는 박 아무개 씨로, 놀랍게도 과거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에서 근무한 경찰관 출신이었다. 2008년 박 씨는 수뢰혐의로 경찰에서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소식에 밝은 한 소식통은 “사이버범죄수사대에서 근무하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얼마나 돈을 쉽게 그리고 많이 버는지 알게 되면서, 조직을 직접 차리는 경우가 있다”고 귀띔했다. 한 보이스피싱 업체 판결문에 따르면 보이스피싱은 초기 자본금으로 2000만 원에서 3000만 원 정도만 투자하면 매월 1억 원 이상 수익도 거둘 수 있는 고수익 업종이라고 한다. 일반인의 피를 빨아 큰돈을 만지는 셈이다.
2015년에도 박 씨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서 보이스피싱 범죄를 전담하던 임 아무개 경사는 수사를 하면서 보이스피싱 조직에 눈을 뜨게 됐다. 2015년 3월 임 경사는 보이스피싱 조직 관리 및 교육 담당 간부급 조직원 이 아무개 씨와 은밀한 계약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뒤를 봐주는 정도였다.
임 경사는 보이스피싱 조직을 수사하는 대신 오히려 범행 사실을 숨기거나 대폭 줄여줬다. 이런 선처를 통해 임 경사는 접대를 받거나 돈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보이스피싱 조직원 적발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돼 직접 뛰어들게 됐다. 임 경사는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에게 자본금 일부를 투자금 명목으로 댈 테니 보이스피싱 사업에서 나오는 수익을 나눠 달라는 제안을 했다. 결국 임 경사는 혐의가 드러나 구속됐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