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각국의 도시들이 봉쇄됐을 당시 가장 눈에 띄게 일어난 변화 가운데 하나는 미용실이었다. 미용실이 문을 닫자 머리를 다듬거나 염색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평소와 달리 자연스럽고 소탈한 모습으로 지내게 된 것이다. 특히 새치 염색을 할 수 없게 되자 반강제적으로 흰머리를 드러낸 사람들이 늘면서 흰머리에 대한 인식도 바뀌게 됐다. 평소였다면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바로 뿌리 염색을 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염색을 못하게 되면서 ‘과연 염색이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칸 영화제에서 염색을 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레드카펫 위에 선 몇몇 배우들이 대표적인 예다.
“조지 클루니는 되는데 왜 저는 안 되나요?”
지난 7월 열린 칸 영화제는 예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코로나 시국인 탓에 철저한 방역 속에 행사가 치러졌으며, 방문객들에게는 백신 접종 완료 인증 QR코드나 PCR 음성 증명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또한 행사장 안에서는 24시간 내내 환기 시설을 가동했으며, 수시로 구석구석을 살균함으로써 바이러스 확산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년과 다른 변화는 레드 카펫 위에서도 나타났다. 앤디 맥도웰(63), 조디 포스터(59), 헬렌 미렌(76) 등 몇몇 여배우들이 평소와 달리 희끗희끗한 머리를 자연스럽게 뽐내면서 등장했던 것이다. 보란 듯이 흰머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 카메라 앞에 선 배우들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맥도웰은 ‘보그’ 인터뷰에서 당시의 소감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염색을 계속해야 하는지 몇 년 동안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코로나19로 인해 도시가 봉쇄되면서 자연스럽게 염색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내친 김에 은발을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로 만들기로 결심한 그는 “낡은 금기를 부수고, 날로 급증하고 있는 ‘흰머리 운동’에 동참하는 자세가 내 삶과 배우 인생에 스릴 넘치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맥도웰은 또한 인터뷰에서 여배우가 흰머리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여배우로서 늙어간다는 것과 미래에 대한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사실 이런 결심은 사회적 편견과 맞서 싸워야 하는 어려운 결정이었다. 맥도웰은 이에 대해 “코로나19 대유행 초기에 집에 갇혀 지내면서 점점 흰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나를 볼 때마다 계속해서 보기 안 좋다고 말했다. 염색을 하지 않자 소금과 후추를 뿌려 놓은 듯 머리카락이 온통 갈색과 흰색이 뒤섞여 희끗희끗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지 클루니도 희끗희끗한 머리인데 왜 나는 안되는 거지?’”라고 회상했다.
결국 염색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는 오히려 이런 자연스러움이 자신의 성향과도 맞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매니저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예상대로 모두들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만류하는 매니저에게 맥도웰은 “아니, 당신이 틀렸다. 이렇게 하면 나는 스스로 더 강인해진다고 느낀다. 2년 후면 나는 65세가 된다. 지금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만 같다”라고 설득했다.
혹시 두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맥도웰은 “처음에는 그랬다. 너무 조심스러웠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발을 쓸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번 해보니 내 직감이 옳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해졌다. 염색을 하지 않으니 스스로 더 강해졌다고 느꼈다. 내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진 듯했으며, 어떤 연기를 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꼭 껴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말 편하다. 오히려 내 얼굴을 더 돋보이게 하는 듯하다”라며 만족스러워했다.
처음 용기를 내기 위해 혹시 할리우드에서도 은발로 활동하는 배우들이 누가 있는지 찾아본 맥도웰은 의외로 많은 남자 배우들이 염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혹 염색을 하는 경우에는 맡은 역할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대해 맥도웰은 “지금까지 나는 배우로서 이런 어려움을 겪어왔다.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젊어 보이라고 요구했다. 내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비록 머리는 하얗게 셌지만 지금 스스로도 충분히 젊고 건강하며, 활력이 넘친다는 맥도웰은 “꼭 외모가 젊다고 해서 젊은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염색을 포기하는 여성들은 유명인들뿐만이 아니다. 유례없는 코로나 시국을 계기로 많은 여성들이 염색을 포기하고 있다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가디언’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은 모두 입을 모아 지금의 모습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호흡요법사인 리사 스패로(57)는 “코로나19로 더 이상 염색을 할 수 없게 된 후로 자연스럽게 흰머리로 살기로 결심했다. 이제야 비로소 내 진짜 모습으로 살고 있다.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해방된 기분이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내가 여전사가 된 기분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힘이 넘치고 멋진 일이다. 우리 사회는 여성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보이고, 옷을 입고, 말하도록 너무 많은 압박을 가한다. 여러분도 이제 흰머리를 보여라. 그리고 힘을 내라”라며 용기를 북돋웠다.
20대 때부터 새치 때문에 염색을 했다고 말하는 포지아(50)라는 여성 역시 “해방된 기분이다”라고 말하면서 “나는 5~6주일마다 뿌리 염색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염색을 하지 않으니 머릿결도 더 부드러워졌다”라며 만족해했다.
이 밖에도 미용사인 사라 오르(44)는 “난 지금 이 모습이 정말 좋다. 더 이상 3주에 한 번씩 자라는 흰머리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IT 컨설턴트인 루실 투트(49)는 “나이가 들어서 자라는 흰머리는 노화 과정의 일부다. 염색을 그만두니 이제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해졌다. 중년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회사에서 혹시 차별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망설였던 제이미 무어(48)는 “과거에는 2주에 한 번씩 뿌리염색을 하곤 했지만 지금은 염색을 안 한 지 400일이 넘었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과연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하다”라며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영국 엑세터대학이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여성들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 조사 역시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많은 여성들이 염색 중단을 선언하기 전에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과 ‘괜찮아 보이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이에 대해 바네사 세실 수석 연구원은 “우리 모두는 외모에 관한 한 사회의 규범과 기대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여성, 특히 나이 든 여성들에게 더 엄격하다”라고 했다. 요컨대 ‘나이 많은 여성’은 사회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로 여겨지며,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면 무능하거나 불쾌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실은 “이번 조사에서 우리는 왜 일부 여성들이 자연스런 흰머리를 선택하게 됐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이들은 비록 무시를 받거나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당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긴다”고 전했다.
다만 이들은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것이 늙어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중요한 점은 동료, 가족, 친구들로부터 얼마나 지지를 받느냐에 달려 있다. 세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염색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이미 일어난 변화가 코로나19로 인해 가속화됐을 뿐이다”라고 분석했다.
이런 이유에서 또한 그는 앞으로 코로나19 대유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수많은 여성들이 용기 내서 당당하게 흰머리를 내보이지 않을까 점쳤다.
흰머리와 스트레스 상관관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바겔로스 의과대학 연구진들이 얼마 전 심리적인 스트레스와 흰머리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방대한 증거를 최초로 공개해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웠던 점은 스트레스 요인을 제거하면 머리색이 다시 원색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이 연구 결과는 쥐를 대상으로 한 ‘스트레스로 발생한 새치는 영구적’이라는 실험 결과와 대조되는 내용이었다.
행동의학 부교수인 마틴 피카드 박사는 지난 6월 22일 ‘이라이프’(eLife)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서 “오래된 흰머리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일반적으로 흰머리가 노화와 스트레스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얻을 수 있다”라고 밝혔다.
실험에 참가한 열네 명의 머리카락 상태를 각각 작성한 스트레스 일지와 비교한 결과, 연구팀은 일부 흰머리가 어느 순간 원래 색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요컨대 스트레스 원인이 제거되면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 피카드 박사는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휴가를 떠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 사람의 새치 가운데 다섯 가닥은 휴가 기간 동안 다시 원래의 색을 띠면서 자랐다”라고 말했다.
다만 피카드 박사는 스트레스를 줄인다고 해서 반드시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이 원래 색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생물학적 나이와 다른 요인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새치가 자라는 경우는 예외”라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새치가 자라기 시작한 사람이 70세가 돼서 스트레스를 줄인다고 해서 원래 머리색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또한 열 살짜리 꼬마가 스트레스가 많다고 해서 꼭 흰머리가 자라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