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382m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져…2000m 산 오른듯 장쾌한 풍경이 서라운드로 펼쳐져
제주에는 360개가 넘는 오름이 있다. 흔히 매일 오름 하나씩 올라도 1년이 모자란다고 한다. 오름은 제주방언으로 조그마한 산체를 뜻한다. 오름은 한라산의 기생화산의 일종이다. 전설에 따르면 오름은 한라산을 옮기던 설문대할망의 치마 폭에서 흙덩이가 떨어지며 생겼다고 하는데 하늘 위에서 보면 정말 그런 듯도 하다. 지질학적으로는 화산활동과 침식, 융기 등 다양한 원인으로 만들어졌다.
오름은 ‘오른다’의 명사형이라는 느낌 때문인지 오르기 전부터 이미 올라가고 있는 상상을 하게 된다. 아이스크림이라는 단어 앞에선 녹기 전에 얼른 핥아 먹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처럼, 오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문득 올라봐야 할 것 같은 감정이 일어난다. 오름의 뉘앙스는 산보다 부드럽고 온화하다. 봉긋하게 솟아있지만 힘겹게 오르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오르는 듯 마는 듯 슬슬 오르면서 만끽하는 오름만의 맛이 있다.
이번엔 제주 오름의 랜드마크라고도 불리는 다랑쉬오름을 오른다. 다랑쉬오름은 제주의 동북쪽 구좌읍 세화리 산 6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분화구가 달처럼 둥글다고 해서 지역주민들이 예부터 다랑쉬로 불렀다. 학자들은 높은 봉우리를 가진 오름이라는 뜻의 우리 옛말 ‘달수리’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다랑쉬오름은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오름으로 화산체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오름의 여왕’으로도 불린다. 제주특별자치도가 2011년부터 다랑쉬오름을 ‘오름랜드마크’로 지정해 관리하는 이유다.
해발 382m의 다랑쉬오름은 오르는 데 30분이면 넉넉하다. 그런데도 오르면서 드문드문 보이는 풍경이나 다 오르고 나서 보여주는 장쾌함은 2000m급 산에 뒤지지 않는다. 이것이 제주 오름을 오르는 맛이자 매력이다. 거스르는 것 하나 없이 360도로 넓게 뻗은 초지는 국내에서 보지 못한 이국의 감성을 느끼게 한다.
올라가는 길이 평지는 아니니 아주 수월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가파른 계단과 경사가 잠깐 잠깐 나오지만 그렇다고 어렵다고 할 것까지는 없다. 산이라고 하지 않고 오름이라고 하는 정도이니 어지간해선 누구든 오를 수 있다. 오르는 길에서 연인은 물론 어린아이를 안은 젊은 아빠와 60~70대의 어르신들, 부모 따라 온 초등학생도 자주 만난다.
오름 많은 제주, 오름에 오르면 더 많은 오름들이 보인다. 흙덩이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야트막한 오름들이 사방에 무시로 흩어져 있다. 서라운드로 펼쳐진 원시적인 풍경이 21세기를 오히려 꿈처럼 느끼게 한다. 공룡시대 어디쯤 와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이 어디인지, 어느 시절, 어느 시간인지 잠시 까마득히 잊힌다. 함께 오른 동행자는 “오름에는 늘 세찬 바람과 함께 포근한 색감으로 어우러진 풍경의 조화가 있다. 오름에 오르면 다른 여행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위안과 쉼이 느껴진다”고 했다.
다랑쉬오름은 다른 오름들이 흔히 그랬듯 1960년대 이전에는 마을 목장으로 이용됐었다. 그 때문에 민둥산이었던 오름에 주민들이 편백나무, 삼나무, 소나무, 비자나무, 왕벚나무 등을 심어 울창한 산림을 만들어 놓았다. 2019년의 식생조사에 따르면 현재 다랑쉬오름에는 310여 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분화구탐방로의 소사나무 군락은 제주 최대 군락지다.
다랑쉬 오름은 제주의 여러 오름들 중에서도 가을에 오르기 더 좋은 오름이다. 길 터주는 억새 물결 때문이기도 하고 가을엔 누렇게 변한 주변의 풍경이 더 그윽해지기 때문이다. 오름 정상부에 오르면 전망대를 지나 언저리로 난 3.4km의 오름둘레길이 있다. 이 둘레길을 한 바퀴 걸으며 오름 바깥으로 보이는 제주의 원시적인 모습을 실컷 누릴 수 있다.
늦가을이지만 아직 푸른 밭들과 그를 둘러친 돌담들이 한 편의 그림을 만든다. 초지 너머로는 멀리 보이는 바다가 햇살을 한껏 받아 윤슬을 반짝이며 일렁거린다. 정상에서 보는 주변 풍경은 한편으론 필리핀 보홀의 키세스 동산을 연상케 한다. 다랑쉬오름에 올라서면 주변으로 백약이오름을 비롯해 손지오름, 동거문이오름 등 주변의 여러 오름들을 조망할 수 있다.
다랑쉬오름에 오르고 오름둘레길 한 바퀴 돌고 다시 내려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각도마다 다른 풍경을 배경삼아 인증사진도 수십 장 남기고 실컷 빈둥거리다 내려와도 2시간을 넘지 않는다. 오름 위는 사실 대체로 바람이 많이 불고 오랫동안 쉴 만한 장소도 딱히 없어 둘레길을 걷고 내려오면 족하다.
바로 옆에는 아끈다랑쉬오름이 있다. ‘아끈’은 ‘작은’이란 뜻으로 아끈다랑쉬오름은 작은다랑쉬오름이라는 말이다. 다랑쉬오름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데다 다랑쉬오름과 닮은꼴을 하고 있어 아끈다랑쉬오름이 됐다. 아끈다랑쉬오름은 오름 전체가 억새로 뒤덮여 있어 제주 가을 명소로 이름을 올리면서 연인들의 포토스폿으로도 유명하다.
아끈다랑쉬오름은 해발 198m로 낮고 작은 오름이다. 다랑쉬오름에 오르고 내리는 동안 아끈다랑쉬오름의 모습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분화구 모양도 다랑쉬오름과 닮았다. 오르는 데 10분이면 족하고 한 바퀴 돌고 내려오는데도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다만 아끈다랑쉬오름은 사유지라 다랑쉬오름에 비해 탐방로가 매끈하게 정비되어 있지는 않다. 흙길이라 비온 뒤엔 미끄럽고 질척거릴 수 있다.
쌍둥이라도 전혀 다른 사람이듯 제주의 오름들은 비슷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풍광과 정취를 자아낸다. 내려다보이는 제주 시골의 모습은 비슷하면서 때마다 다르다. 한 가지 공통점은 언제든 오르기만 하면 막혔던 속을 뻥 뚫어준다는 것. 제주엔 오름이 360개가 넘으니 욕심만큼 가볼 일이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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