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읽었는지. 거기서 그대는 어떤 인물에 끌렸는가. 나는 인물보다도 인연에 끌렸다. 여포가 동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진궁이 조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나라의 손부인이 유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무엇보다도 공명이 유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인생은 또 어떻게 펼쳐졌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때 너를 만나 나 망쳤다고 징징 대는 사람은 하수다. 고수는 너를 만나 벼랑 끝에 내몰린 삶을 살게 되었을지라도 너로 인해 한 수 배웠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운명을 긍정하는 삼국지의 영웅들을 보고 있노라면 생에서 추구할 것은 확실히 안락이 아니라 경험이다. 프롬의 언어를 빌리면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손권의 오나라라는 삼국의 역사를 1000년 뒤에 나관중이 다룬 ‘삼국지연의’를 보고 그들의 성격이나 능력이 실제였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겠다. ‘삼국지’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의 파괴력을 견디며 1000년을 내려온 고전이다. 그것이 고전이 된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록해서가 아니라 동양정신이 그려 보여준 영웅들의 성격, 책사들의 활약, 그리고 세계관 혹은 인간관 때문일 것이다.
‘삼국지’ 중 요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때문에 다시 회자된 것이 비단주머니 세 개다. 뉴스에게 이 대표가 윤석열 후보에게 건네준 비단주머니들을 보고 나는 크게 웃었다. 실제로 비단주머니는 비밀스럽게 주어지고 비밀스럽게 펼쳐보는 것일 텐데 어떨 것인가. 정치적으로 놀 줄 아는 감각 있는 젊은 정치인의 놀이인 것을. 그렇지만 실제로 그 비단주머니는 물 건너 간 것 같다. 비단주머니에게 힘을 주는 것은 신의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어느 분야든 제갈공명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들 대부분은 야심이 있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머리가 좋고 야심이 있는 사람은 제갈공명이 되기보다 재승박덕인 경우가 많다. 나는 생각한다. 공명의 힘은 머리 좋음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신의에서 온다고.
죽은 유비에게 충성하며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리는 공명의 출사표를 보고 나서 나는 비로소 머리 좋음에 감춰진 공명의 신의를 보았었다. 그리고 나서야 유비를 삼고초려하게 한 공명의 행위를 이해했다. 그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장사치의 속셈 혹은 오만이 아니다. 공명은 시끄러운 세상사에 치이며 자기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공명에게는 세상을 희롱하며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홀린 듯 유비를 도와 전쟁터로 나온 것은 야심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 믿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의리 혹은 사랑 같은 것.
세 개의 비단주머니는 오나라로 건너가야 했던 유비를 눈앞에서 지키지 못하게 된 공명의 지혜주머니다. 그것은 사심 없는 공명의 예지력이지만, 서로에게 영감으로 존재하는 사이에서만 꽃을 피우는 삶의 힘이다. 고비 때마다 비단주머니에서 답을 찾는 유비의 믿음을 보며 나는 사심 없는 자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삶은 자기 믿음대로 펼쳐지는 한바탕 꿈인지도 모르겠다.
그대에게도 그런 비단주머니가 있었는지. 문득문득 나는 내게도, 우리에게도 그런 주머니가 있었다고 믿는다. 고비고비의 어둠을 헤쳐 여기까지 온 그대가, 내가 증인이 아닐까.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배웠으면 배운 대로, 못 배웠으면 못 배운 대로 삶은 종종 눈물겹도록 힘들고, 그 눈물로 자기 허물을 벗겨내야 한다. 그때 장님처럼 더듬으며 내 촉을 믿게 해준 사람들, 인연들이 언젠가 건네준 비단주머니를 열어보게 되는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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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