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남 전문경영인 출신으로 역대 8번째 타이틀…삼성에서 ‘회장’이란 공로 인정해주는 명예직
#수장 전부 교체, 한종희·경계현 체제로
삼성전자는 지난 12월 7일 정기 사장단 인사에서 반도체(DS)·소비자가전(CE)·IT모바일(IM) 등 3개 사업부문장을 교체하고 CE와 IM 부문을 ‘세트부문’으로 통합했다. 한종희 CE부문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이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해 세트부문장을 맡았다. DS부문장은 삼성전기를 맡은 경계현 대표이사 사장이 맡으면서 투톱 체제가 형성됐다. 사업지원태스크포스(TF) 수장인 정현호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해 안정적인 사업 지원과 미래 준비에 힘쓸 전망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수감 중이던 2017년 11월 출범한 삼성전자 사업지원TF는 전자 계열사를 아우르며 전략·인사 업무를 총괄한다. 김현석 소비자가전부문장 사장과 고동진 IT모바일부문장 사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어 12월 9일 정기 임원 인사에서는 부사장 68명, 상무 113명, 펠로우 1명, 마스터 16명 등 총 198명을 승진시켰다. 부문별로 개발·기획 역량을 갖춘 30대 상무와 40대 부사장을 적극 발굴했다. 부사장에는 세트부문의 고봉준 VD(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 서비스 소프트웨어 랩장(49), 김찬우 삼성리서치 스피치 프로세싱 랩장 부사장(45), 박찬우 세트부문 생활가전사업부 IoT Biz그룹장(48) 등이 발탁됐다. 또 소재민 VD사업부 선행개발그룹 상무(38)와 박성범 S.LSI사업부 SOC설계팀 상무(37) 등 젊은 리더들이 등장했다. 다양성·포용성도 강화했다. 외국인·여성 신임 임원 및 부사장 승진자는 총 17명으로, 전년(10명)보다 7명 증가했다.
이번 인사의 특징은 CE와 IM 부문을 통합해 빠른 의사 결정과 시장 대응, 융·복합을 강조한 점이다. 아울러 나이가 아닌 실력 위주의 성과주의 인사였으며,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한 미래 핵심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관련 분야별 우수 인력을 많이 발탁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승진자가 특정 사업부에 많다는 점은 그 분야를 키운다는 뜻인데, 소프트웨어 전문가가 다른 분야보다 훨씬 더 많이 승진했다”며 “아울러 반도체부문은 B2B고 소비자가전과 IT모바일은 B2C인데, B2C를 세트부문으로 통합했다. 애플과 달리 삼성은 B2C로 수익성이 좋지 않은 만큼 소프트웨어와 플랫폼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샐러리맨 신화' 쓴 역대 회장들 면면은
이번 인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회장'이 나왔다는 점이다. 기존 삼성전자 대표이사이자 DS부문장이었던 김기남 부회장이 회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종합기술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삼성전자 측은 반도체 사업의 역대 최대 실적과 글로벌 1위 도약 등에 기여한 공을 감안해 회장으로 승진시켜 미래기술 개발에 대해 조언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맡긴다고 설명했다. 비록 경영의 최전선은 아니지만 '삼성'이라는 무게를 고려하면 '회장'이라는 타이틀은 큰 영예다. 큰 성과를 기록한 이들에게 예우 차원에서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내주는 건 다른 기업에서는 보기 어려운 삼성그룹만의 특징이다. 삼성에서는 부회장과 사장 직함을 단 대표이사들이 경영을 총괄한다.
김기남 신임 회장은 강릉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 전자공학 석사와 UCLA 전자공학 박사를 거쳐 1981년 삼성전자 반도체 제조기술팀에 입사했다. 이어 2009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장, 2011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장, 2012년 삼성디스플레이 대표이사 겸 올레드(OLED) 사업부장, 2013년 메모리사업부장에 오른 뒤 2014년 반도체 총괄 겸 시스템 LSI 사업부장 등을 거쳐 올해 5월 반도체 총괄 사장에 임명됐다. 40여 년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에만 몸을 담으면서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의 역대 최대 실적을 내고 글로벌 1위로 도약하는 데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그룹 전체 계열사에서 총수 일가를 제외한 전문경영인 출신의 회장 승진은 김기남 회장이 8번째다. 김 신임 회장은 회사에 기여한 공으로 지난해 고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이후 1년째 비어 있던 삼성전자 회장이라는 상징적인 자리에 올라서게 됐다. 김 회장이 이번에 자리를 옮긴 삼성종합기술원은 인공지능(AI),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 첨단 소프트웨어 등 미래 기술을 연구하는 조직이다.
재계 관계자는 “회장 직함을 주는 것은 굉장히 큰 공로가 있기 때문에 대우해주는 차원일 뿐 실무를 맡기지는 않는다”며 “종합기술원에서도 실제 어떤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종합기술원장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이어 “종합기술원은 먼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는 원천기술을 맡는 곳”이라며 “말 그대로 연구개발만 한다.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기가 가장 좋은 조직”이라고 전했다.
재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오너가 아닌 인사를 회장에 올리는 경우가 드물다. 독특하게 삼성은 전문경영인에게 회장 직함을 주고 있다. 현실에서는 오너 일가가 회장을 맡기도 어렵다. 올해 가석방된 이재용 부회장은 아직 취업제한이 걸려있고 재판도 진행 중이다. 법적 제약이 사라지면 회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높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12년 인사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한 뒤 10년째 부회장직만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 회장직은 실무는 맡지 않더라도 상징적 의미가 크다. 역대 창업주들이 명예회장 직함을 가진 것처럼, 회사에 기여한 공로를 대내외적으로 인정해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역대 삼성 회장도 다들 삼성그룹의 성장 기틀을 만들었던 인사다. 상당수가 반도체부문에서 성과를 바탕으로 회장직에 올랐다.
전문경영인 출신으로 가장 먼저 회장직에 오른 인물은 고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으로, 삼성 반도체 신화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를 거쳐 1973년부터 삼성전자 상무로 입사했고, 창업주 이병철 전 회장의 강한 신뢰 아래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 삼성전자 반도체통신 대표이사 사장, 삼성반도체통신 대표이사 부회장,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 등을 역임했다.
강진구 전 회장은 특히 1980년대 초반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할 당시 적극적으로 의사결정을 주도하며 반도체 사업을 일궈냈다.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됐던 256kb D램 개발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 덕분에 1998년 삼성전기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2000년 건강 문제와 후진 양성을 이유로 회사를 떠났다. 삼성전자는 2017년 강 전 회장이 별세했을 때 공식 자료에서 “강 전 회장은 불모의 대한민국 전자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켜 우리 시대 첨단 제조업을 일군 개척자적 경영인”이라고 강조했다.
강진구 전 회장 이후로는 △박기석 삼성종합건설 회장(1991년) △이수빈 삼성증권 회장(1993년) △김광호 삼성그룹 미주본사 회장(1997년) △임관 삼성종합기술원 회장(1999년) △현명관 삼성물산 회장(2001년) △권오현 삼성종합기술원 회장(2017년) 등이 삼성그룹 계열사의 회장직에 올랐다.
김광호 전 회장은 1969년 삼성전자의 전신인 삼성전자공업에 입사한 뒤 20년 가까이 삼성의 초기 반도체 사업을 이끌었다. 1990년 반도체부문 사장으로 승진한 뒤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 부회장으로 승진해 삼성전자가 64KD램, 1메가D램, 4메가D램 등을 잇달아 개발해내며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크게 좁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 미주본사 회장으로 승진했으며, 1년 후 국내로 돌아와 1998년 삼성전관(현 삼성SDI) 회장을 지낸 뒤 이듬해 현역에서 물러났다.
2018년 삼성전자 회장직에 오른 권오현 전 회장은 지난 1985년 삼성전자 입사 이후 32년간 반도체부문 사업 전반을 도맡으며 삼성전자가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1위가 되는 과정을 함께했다. 개발팀에서 4MB D램, 64MB D램 개발 등 굵직한 성과를 냈고 이후에는 시스템LSI에서 제품기술실 실장, ASIC 사업부장, 시스템LSI 사업부장 등을 거쳤다. 2008년에는 반도체사업부장, 2011년 DS부문장, 2012년 대표이사와 DS부문장 겸 삼성디스플레이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2017년 회장으로 승진해 종합기술원을 맡았고 2020년 퇴임했다.
삼성그룹은 회장을 비롯해 핵심 요직을 거친 임원들은 퇴임하면 상근 또는 비상근 고문으로 선임해 2~3년가량 퇴임 예우를 한다. 권오현 전 회장도 현재 삼성전자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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