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 담긴 바느질로 ‘시간의 옷’을 짓다
이 글은 과연 무엇에 대해 쓴 것일까. 조선 순조 때 유씨 부인의 수필인 ‘조침문’ 중 한 구절로, 바로 바늘에 대해 쓴 글이다. 27년간 애지중지 써온 바늘이 부러지자 이를 의인화해 제문 형식으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바늘은 오래전부터 규방(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의 필수품이었고, 우리 복식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귀중한 도구였다. 예절을 숭상하던 우리 조상은 정갈하게 의복을 갖춰 입는 데서 ‘예’가 시작된다고 여겼고, 의복 만들기의 핵심은 다름 아닌 바느질이었다. ‘침선’이란 바늘과 실 또는 바느질을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 바느질로 옷과 장신구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가진 장인을 ‘침선장’(針線匠)이라 한다.
인류는 역사 시대 이전부터 바늘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평남 온천군 운하리 궁산마을에 있는 신석기 시대 조개더미 유적에서 삿바늘(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꿰매는 데 쓰는 큰 바늘)과 뼈바늘이 출토되었다. 또한 신라시대 분황사 석탑 안의 석함 속에서는 금·은 바늘 및 침통이, 고구려의 유물에서도 금바늘이 각각 발견된 바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삼국사기’를 통해 볼 때 삼국시대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의 침선 문화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침선 기술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복식의 발달과 함께 더욱 발전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침선장 10명이 공조에, 64명이 지방 관아에 소속돼 활동했다. 궁중에서는 상의원에 배속된 침선장으로 하여금 각종 궁중 의류를 제작하도록 했고, 관비의 신분인 침선비를 두어 부족한 일손을 돕도록 했다.
당시 옷을 만들려면, 실을 만드는 제사장, 실이나 천에 물을 들이는 청염장이나 홍염장, 옷감을 짜는 직조장이나 능라장, 천을 다듬고 손질하는 도련장, 옷감을 재단하는 재작장, 금박이나 자수 등 무늬를 수놓는 금박장·자수장 등 여러 장인의 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옷의 맵시나 품위, 효용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장인은 바느질을 직접 담당하는 침선장이었다. 당시 침선장들은 옷 한 벌을 제작할 때도 옷 입는 계절, 옷 임자의 나이와 신분, 옷의 용도, 당대의 유행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했다. 즉 전통적인 침선장은 혼자 디자이너, 재봉사 등의 역할을 함께 수행했기에 빼어난 솜씨는 물론 색감과 미의식 등을 갖추어야 했다.
전통적으로 옷감은 주로 비단, 무명, 모시, 마 등이 쓰였다. 바느질 실은 옷감의 재질, 색상, 두께 등에 따라 달리 선택됐는데 주로 무명실이 많이 사용됐다. 우리 한복의 특징은 평면적인 옷감을 직선으로 재단한 뒤 이를 다시 입체적인 인체에 맞도록 남은 부분을 주름잡거나 끈으로 고정해 미적 감각을 살리는 옷이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옷감에 많은 여분을 두고 치수를 재고 잘랐으며, 인체의 변화와 의복이 해지거나 세탁 후 옷감이 줄었을 때를 대비해 시접(옷 솔기 가운데 접혀서 속으로 들어간 부분)을 충분히 두고 바느질했다.
바느질 기법으로는 옷감의 가장자리 등을 실올이 풀리지 않게 용수철이 감긴 모양으로 감아 꿰매는 ‘감침질’, 옷감 두 장을 포개어 바늘땀을 위아래로 드문드문 꿰는 ‘홈질’, 실을 곱걸어서(두 번 겹치게 얽어서) 튼튼하게 꿰매는 ‘박음질’ 등이 기본적으로 활용됐다. 특히 계절 변화를 비롯해 옷감과 옷의 종류 및 부위, 이음새 등에 따라 바느질 기법을 적절히 달리 사용했다. 가령 여름에는 홑으로 솔기(옷을 지을 때 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를 가늘게 바느질하고, 봄·가을에는 겹으로 바느질하며, 겨울에는 옷감 사이에 솜을 넣어 누비 바느질을 했다.
한 땀 한 땀 노력과 정성으로 완성하는 손바느질의 전통은 1900년대를 전후해 재봉틀이 한반도에 유입된 이후 점차 퇴색한다. 재봉틀이 널리 보급되고, 각종 의복을 기계를 이용해 대량생산하는 체계로 넘어가면서 수공예 형태의 바느질이 설 자리를 잃게 된 것. 이러한 현상은 그간 바느질을 전담해온 여성들이 일에서 해방되어 사회적 진출을 하도록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 침선 기법의 맥이 끊어지는 위기를 낳았다. 게다가 옷이 해질 때까지 입고 쓰던 과거와 달리, 라이프 스타일과 소비 행태까지 바뀌면서 바늘과 실의 쓰임새도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됐다.
마침내 정부는 1988년 침선장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전승의 길을 열게 된다. 초대 침선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이는 당시 일흔여섯 살의 정정완 선생.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맏딸이기도 한 그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 우리 전통 옷을 구현하고 침선 기술을 계승하는 터전을 마련했다. 현재는 그의 맏며느리이자 제자인 구혜자 선생이 침선장 기능보유자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전통 복식을 체계화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구 침선장은 얼마 전 팔순을 맞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시회를 열었다. ‘시간의 옷을 짓다, 동행’이라는 전시회 제목처럼, 앞으로 많은 이들이 우리 옷의 나아갈 길에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료 협조=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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