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보며 끝없는 평야 누비고 오름과 바다도 원 없이 감상
이런 상황에서 여행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철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 단락이 끝나고 또 다른 장이 시작되는 연말연시에는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 정리와 계획의 시간을 갖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시국이니 지금 가라고 권하지는 못하겠고, 꼭 지금이 아니라도 무언가를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어질 때 언제라도 훌쩍 떠나 이국적인 자연 속에 안겨 나만의 시간을 갖기에 좋은 제주올레 12코스를 소개한다.
제주의 서남쪽에 위치한 제주올레 12코스는 제주올레 중에서도 유독 다채로운 지형과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다.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가면 길은 서귀포 무릉2리에서 시작해 녹남봉을 거쳐 신도 앞바다로 뻗어나간다. 바다로 나간 길은 다시 수월봉과 자구내포구를 거쳐 당산봉과 생이기정바당길을 누빈 후 용수포구에 이른다.
12코스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드넓은 평야지대와 3개의 오름, 노을 지는 제주만의 서해를 두루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제주올레를 걷는 올레꾼들에게도 손꼽히는 코스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12월 걷기 좋은 길로, 또 사진작가들이 추천하는 ‘사진 찍기 좋은 길’로 뽑히기도 했다. 17.5km, 6시간이나 걸리는 길로 결코 짧지 않지만 제주에 왔다면, 걷기를 즐긴다면, 도전해 볼 만하다.
‘제주의 진정한 묘미는 올레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처럼 올레길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감흥을 준다. 근 몇 년 동안 적어도 30번은 제주에 다녀간 기자에게도 올레는 종종 신선하다. 특히 제주올레 12코스는 이국적인 기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길이다. 요즘처럼 언감생심 해외는 꿈도 꾸지 못하는 시절에 방랑벽 심한 ‘여행쟁이’들에게 올레 12코스는 일종의 해방구다.
무릉2리 자연생태문화체험골에서 시작하는 12코스의 초반은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연상케 하는 평야지대다. 이 길을 걷는 이들은 이곳이 중앙아시아 어느 평원인지, 유럽의 이름 모를 시골마을인지 헷갈릴 것이다. 지평선이 문득 시야에 들어온다. 생경하다. 지평선이라니…. 잠시 눈을 감고 걷는다. 그 사이 여린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스친다. 고요한 와중에 문득 마음의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환청은 아니다.
끝도 없는 평야 위로 제주 현무암이 얼기설기 쌓인 제주 밭담이 요리조리 선을 긋고 있다. 겨울인데도 때 아닌 푸른 밭들이 잠시 계절을 잊게 한다. 정체는 양파밭, 양배추밭, 순무밭, 마늘밭 등이다. 유채꽃밭도 있다. 유채꽃은 봄에 피는 것 아니었던가? 제주의 거친 땅은 계절을 순순히 이행하지 않는다. 말 안 듣는 반항아처럼 한겨울에 노랗게 꽃을 피워 올린다. 겨울 속에서도 문득 봄을 만들어낸다.
이어 야트막한 뒷산 같은 녹남봉에 오른다. 녹나무가 많이 심겨 있어 녹남봉이다. 평야를 뒤로 하고 갑자기 오솔한 숲길에 오른다. 평야가 지겨울까 올레가 마련한 작은 변화구다. 녹남봉 전망대에선 주변 풍광을 360도로 내려다볼 수 있다. 잠시 쉬어가기 좋다. 걷는 것만큼 쉬는 것도 올레의 어엿한 여정이다.
작은 봉오리 하나 오르내리니 곧 바다다. 절벽 해안선이 이어진 바닷길 옆으로 하늘에는 양털구름이 송송이 박혔다. 이곳은 또 어느 꿈결인지…. ‘역시 제주는 제주구나’를 연발하게 하는 풍경이다. 수월봉까지 제주 해안길을 걷는다. 해안도로 옆이라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평야는 건너뛰고 바다구간만 걷는 사람도 있다.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이내 또 다른 봉우리인 수월봉이 이어진다. 수월봉 정상에는 고산기상대가 있다. 수월봉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수월봉 지나 엉알해안 따라 걷는 길은 제주 지질트레일의 일부이기도 하다. 해안 절벽 따라 화산 퇴적물이 쌓여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차귀도가 한 눈에 보이는 포구도 지난다. 해안을 지나는 길에는 자연스럽게 노을 지는 바다를 만난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남았다. 스스로 끝내기 전에 길은 끝나지 않는다.
자구내포구를 거쳐 당산봉을 지나면 새가 많은 절벽이라는 뜻의 생이기정길이 나온다. 바다와 절벽을 낀, 토박이도 인정하는 절경이다. 생이기정길은 겨울철새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발걸음을 서둘러 또 다시 해안 따라 걷다 보면 용수포구에 닿는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길도 마침내 끝난다. 이럴 땐 끝도 시작만큼 좋다. 홀가분하고 시원하다. 이쯤에서 2021년을 보내련다. 미련이 많으면 미련한 사람이라고 했다. 미련과 후회, 이루지 못한 한 해의 꿈들일랑 그만 바다 속에 던져버리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서귀포=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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