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한국노총 간담회 후 변화된 분위기…민간기업 확대 두고 경영계·노동계 기싸움
기업은행 노조는 금융권에서 노조추천이사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곳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도입 성패에 따른 상징성이 뒤따른다. 윤종원 기업은행장은 2020년 1월 취임 당시 노조와 직무급제 등 임금체계 개편 금지와 함께 노조추천이사제 도입 추진을 약속하기도 했다. 2020년 2월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도 노조추천이사제에 대해 “사외이사 중 한 분이 직원 이익을 대변해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일해주면 회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기업은행의 노조추천이사제는 도입되지 않고 있다. 기업은행 사외이사였던 김정훈 단국대학교 교수와 이승재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의 임기는 각각 올해 2월과 3월까지였다. 기업은행 노조는 이들 임기 만료에 맞춰 새로운 사외이사를 추천했지만 결과적으로 선임되지 못했다. 대신 사측이 추천한 인사인 정소민 한양대학교 교수가 새로운 사외이사로 선임됐고, 김정훈 교수는 재선임됐다.
당시 기업은행 노조는 “이번 사태는 단순히 하나의 제도 도입이 무산된 것이 아니라 집권여당과 문재인 정부가 노동계와 약속한 사항을 파기한 사건”이라며 “윤종원 IBK기업은행장과 노조와의 합의사항을 보증했던 이인영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혀라”라고 비판했다.
중소기업은행법에 따르면 기업은행 이사는 은행장의 제청으로 금융위원회(금융위)가 임면한다. 윤종원 행장은 금융위에 노조가 추천한 인사를 사외이사로 추천했지만 금융위가 선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은행 노조가 문재인 정부를 언급한 것도 금융위의 결정을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윤종원 행장 측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들어 한 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다. 윤 행장은 2021년 2월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노조추천이사제에 대해 “사외이사 선임 여부는 후보 역량에 따라 좌우될 것이며 특정 후보가 자동 선임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노조추천이사제나 노동이사제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사안으로서 관련 법률의 개정이 수반돼야 추진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간 정치권에서는 노조추천이사제나 노동이사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협의회는 2020년 11월 “공공노동자들은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쟁취를 위해 여·야를 막론하고 협조를 요청했고 때로는 읍소도 마다하지 않았다”면서도 “여당은 조속히 도입하겠다는 공수표와 허언만을 되풀이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최근 윤석열 후보가 노동이사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다. 윤석열 후보는 지난 12월 15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 정책간담회를 열었다. 한국노총은 이날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사업장 이전 시 고용승계 △근로자대표제 △공공부문 노동이사제 △교원·공무원 타임오프 △최저임금산입범위 일원화 △1년 미만 근로자 퇴직급여 보장 등 7개 입법과제에 대한 윤 후보의 입장을 요구했다.
윤석열 후보는 “노동이사제가 잘 되기만 한다면 한국 경제 미래에 밝은 시그널을 줄 것”이라며 “공공기관이 부실하면 국민 세금으로 막아야 하는데 노동이사제가 공공기관의 합리화와 부실 방지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긍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윤석열 후보의 발언 후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노동이사제 법안 도입에 관심을 보인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2월 20일 손경식 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을 만나 “노동이사제 문제는 윤석열 후보가 한국노총을 방문해 의사표시를 하는 바람에 논의가 조금 진전되지 않을까 하는 상황에 있다”고 말했다. 이에 손경식 회장은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면 이사회가 노사 갈등의 장으로 변질되고, 효율적 의사결정 지연 등 많은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기업은행 노조는 정치권 논의와 상관없이 2022년에도 노조추천이사제를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기업은행 사외이사인 신충식 예일회계법인 고문과 김세직 서울대학교 교수의 임기는 2022년 3월까지다. 기업은행 노조 관계자는 “사외이사 임기 만료가 내년 3월이다 보니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지만 내부적으로 준비는 하고 있다”며 “(최근 정치권 논의를) 긍정적인 신호로는 보지만 아직까지 보장된 것은 없으니 특별한 입장을 밝히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최근 정부에서도 관련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는 만큼 금융권에서는 노조추천이사제 도입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2021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은 범정부 차원에서 도입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노조추천이사제 관련해서는 합리적으로 운영이 되도록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기업은행 관계자는 “지금으로는 말씀 드릴 것이 없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기업은행 등 공공기관에서 노조추천이사제를 도입하면 금융권을 포함한 민간기업에도 노동이사제나 노조추천이사제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 일부 민간 금융사 노조는 과거에도 노조추천이사제를 추진한 바 있다. KB국민은행 노조는 2017년 노조추천이사제를 추진했지만 주주총회에서 부결됐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아직 내부적으로 노조추천이사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기업은행이 노조추천이사제를 도입하면 일반 시중은행에서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노동계에서도 공공기관뿐 아니라 민간기업에도 노동이사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경제계는 노동이사제 도입이 민간기업에 미치는 영향 등을 들어 반대한다고 밝혔다”며 “노동이사제가 도입돼야 하는 이유는 한국 기업은 노사관계 힘이 지나치게 사측으로 기울어졌고, 재벌 대기업 오너리스크가 다른 어느 나라 기업보다 크다”고 주장했다.
다만 경영계에서는 여전히 노동이사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어 다양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재계에서는 공공기업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더라도 민간기업으로 확산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은 2021년 12월 20일 “우리나라와 같이 대립적 노사관계가 짙은 경우 노동이사제 도입은 경영상 의사결정의 신속성과 전문성을 해칠 우려가 크므로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고 전했다.
윤석열 후보 측도 민간기업 노동이사제 도입에 대해서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은혜 국민의힘 선대위 대변인은 “윤 후보의 입장은 노동자와 기업의 이해가 따로 분리돼서 가자는 것이 아니다”라면서도 “공공부문 노동이사제를 시행해보면서 민간기업은 그때 가서 판단하고 지켜보자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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