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 |
지난 7일 한나라당사 대표실에서 만난 홍준표 신임대표는 “어제 평창에 갔다가 새벽에 올라와서 한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 분위기가 너무 열광적이었다”며 웃음을 보였다. 마침 인터뷰 전날 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소식이 전해졌던 터. 이번 전당대회를 앞두고 강행군을 이어왔던 홍 대표는 전대 이후엔 더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스케줄을 보고하던 비서진에게 “내가 강철이냐”며 푸념 섞인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중요한 고비에 당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앉은 소명의식 때문인지 홍 대표는 앞날에 대한 자신감만큼은 대단했다. 그는 “한나라당의 위기를 벗어나게 할 인물은 나밖에 없다”는 결의에 찬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홍 대표의 뒤로 이명박 대통령과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보낸 당선 축하난이 동시에 눈에 띄었다.
아직도 당선 축하 세례를 받고 있기 때문인지 홍준표 대표를 만나러 간 날에도 대표실 앞에는 ‘대기’ 중인 이들이 여럿이었다. 당직 인선을 앞두고 있던 터라 의원들의 발길이 잦은 모양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온 축하전화를 전화기 조작 미숙으로 받지 못했다고 들었다”고 하자, 홍 대표는 “전화가 왔는지 안 왔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이 전화기가 바꾼 지 이틀 된 건데 내가 조작법을 잘 모른다. 그날은 전화가 엄청 와서 거의 받지 못했다. 대통령이 더반에서 돌아오면 만날 것”이라며 ‘오해’를 풀었다.
―새 지도부와 함께 당을 이끌어가게 되었는데, 어떤 각오를 갖고 있는가.
▲이번 지도부가 한나라당 사상 제일 젊은 지도부다. 당 대표 역시 박근혜 전 대표께서 쉰둘에 당 대표를 하셨고 내가 쉰일곱이니까 두 번째로 젊은 당 대표가 된 것이다. 당은 젊어졌는데, 한나라당이 부자 정당, 특권층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깨는 것이 첫째 관건이다. 계파로 흩어진 당의 결속을 도모하는 게 두 번째 과제라고 본다. 당이 결속하고 친서민 정책을 강화하게 되면 돌아섰던 국민의 마음이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전당대회 결과 ‘친이계의 몰락’이라는 평과 함께 친박계의 지도부 입성이 눈에 띈다.
▲우선 나는 계파에 속해 있지 않다. (“요즘은 홍 대표를 ‘친박’으로 보는 시각이 많던데”라고 묻자) 그건 홍준표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나는 현직 대통령 계보에도 속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대통령과는 사적인 인연이 15년이지만, 홍준표 자존심상 어느 계파에 속해서 정치하지 않는다. 친박이라는 타이틀은 구차한 이야기다. 나는 친이도, 친박도 아니다. 내 소신대로 정치해온 사람이다.
홍준표 대표는 “그런데 당원들이 왜 나를 선택했겠나. 친이-친박 간 계파 투쟁이 너무 지겹다는 것이고, 당의 위기에서 ‘돌파형 리더십’을 원했기 때문에 날 선택한 것 아니었겠나. 그것도 압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친박계의 지원이 당선에 큰 힘이 된 것만은 사실 아닌가.
▲친이계 지원도 있었다. 소장파의 지원도 있었고, 쇄신파의 지원도 있었다. 투표를 하고 다 봉해버렸는데 친박계가 투표했는지 어찌 아는가(웃음).
―유승민 최고위원의 ‘2위’ 당선에 대해선 어떻게 평하나.
▲친박의 결집이다. 친박계의 힘이 전당대회를 통해 확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선 이후 ‘계파 종식’에 대해 누차 강조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계파를 없애야만 우리가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 계파 해체를 하자고 최고위원회로 다함께 뜻을 모았고, 그 방법에 대해선 대표에게 일임해 달라고 했다. 지금 그 방법을 고민 중이다.
―‘계파 활동을 하면 내년 총선에서 공천을 안 주겠다’는 발언으로 거센 논란을 불렀는데.
▲그건 ‘알레르기 반응’이다. 18대 공천이 사감에 의한 공천이었다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의원들이 불안한 거다. 그런데 나는 의원들이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본다. 4년 동안 국회의원 활동 제대로 하고 지역구 잘 살핀 의원이라면 친이, 친박 상관없이 무조건 선거에 내보내야 한다. 내가 ‘공천의 3원칙’을 이야기했다. 상향식 공천, 개혁 공천, 이기는 공천이다. 방점은 세 번째에 있다. 이길 수 있는 인사라면 계파를 안 가리겠다는 거다.
―이재오 특임장관과는 전대 이후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이 장관이) 아프리카로 출국하기 직전에 한 10분 통화를 했다. ‘니가 된 게 잘되었다, 앞으로 잘 협조하겠다’고 하더라. 이재오 장관과는 15대 국회 입성 동기다. 연세가 나보다 여덟 살 많기 때문에 ‘형님, 형님’ 하고 지낸 지가 15년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거나 노선이 다르거나 그런 게 없다. 대신 이재오 선배는 계파를 갖고 있고, 나는 계파가 없다는 그 차이다. 원래 우리 둘은 사이가 좋았다(웃음).
홍준표 대표는 박근혜 전 대표에 관한 이야기에는 다소 민감하게 반응했다. 인터뷰 전날 평창에서 박 전 대표를 만나 직접 축하인사를 받았다는 홍 대표에게 “어떤 축하인사를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축하인사 했다 하면 그뿐이지, 그만하지”라고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언급했다는 뉴스에 대한 그의 ‘설명’도 궁금했다. 홍 대표는 “그건 기자들이 잘못 들었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 그건 전두환 대통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내 주요세력이었던 친이계가 전당대회를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는데.
▲그건 자연의 섭리와 같은 거다. 권력 후반기에 들어가면 자연히 결속력이 약화되는 거다. 권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결속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결속이 유한되고, 이건 자연의 섭리다. 앞으로는 친이, 친박이 없는 ‘한’나라로 결속될 것이다.
―내년 총선 전략은 어떤 것인가. 목표 의석수는.
▲96년 총선의 의석수만 얻을 수 있다면 대성공이라고 본다(당시 한나라당의 전신 신한국당이 얻은 의석수는 139석이었다).
―전당대회 선거운동 중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야당 공세를 막겠다’고 해 일명 ‘보디가드론’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그건 저급한 언론에서 지어낸 거다. 강원도비전발표회에서 하도 ‘박근혜 마케팅’을 하길래 ‘이 대회가 한나라당 대표를 뽑는 일이지, 한나라당 보디가드를 뽑는 거냐’ 내가 그렇게 질타했던 거다.
―당대표로서 앞으로 야당 공세가 강화되면 여당의 유력 대선주자 중 한 명인 박근혜 전 대표를 보호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할 텐데.
▲10년 야당 생활을 하며 공격도 해보고, 수비도 해봤다. 나만큼 경험 있는 사람이 없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즉각 대처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한나라당에선 나밖에 없다.
―‘우파 포퓰리즘’ 정책을 펴겠다는 발언도 논란이 있었다.
▲친서민정책 강화라는 측면에서 하자는 거지, 포퓰리즘을 하자는 게 아니다. 친서민정책 강화라는 것을 레토릭하면 ‘우파포퓰리즘’이라도 하자, 그 뜻이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대한 논란도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정책을 존중한다. 당 지도부에 일부 반대 의견이 있지만 조율할 것이다. 그 뒤 구체적인 방향을 내놓을 것이다.
홍준표 대표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 첫 원내대표를 역임한 바 있다. 당시 그는 행정부에 대해 종종 강도 높게 비판하며 ‘군기반장’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홍 대표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군기를 정말 많이 잡았다. 행정부에서 잘못하는 게 있으면 사정없이 혼내줬다. 당정 협의를 할 때 기자들이 나가면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뒤 ‘당신 말이야, 그렇게 하면 됩니까’ 하고 따졌다. 나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간 장관이 한두 명이 아니다. 역대 여당 원내대표 중에 행정부 감시 역할은 내가 가장 잘했다고 자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앞으로는 더 강하게 할 것이다. 내가 비판하기에 앞서 미리 잘못하지 못하도록 해야지”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황우여 원내대표의 역할과 당 대표인 자신의 관계에 대해선 익히 잘 알고 있을 터. 그러나 법인세 감세 철회 문제와 무상급식 주민투표 등 현안에 관해 두 사람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어 적잖은 마찰도 예상되고 있다.
―황우여 원내대표와의 관계 설정은.
▲ 지난 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선출된 홍준표 의원이 손을 흔들어 당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초기의 대기업 우대정책은 이제 친서민 정책으로 돌아섰다. 그때는 글로벌 경제위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대기업 우대정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금융위기를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친서민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 이미 국정기조가 바뀌었고, 나는 잘 바뀌었다고 본다. 또 정치는 당이 앞장서서 해야 한다. 당이 앞장서 청와대와 정부를 끌고 가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도 대통령과 협의가 잘 될 것으로 믿고 있다. 당·청이 충돌하면 공멸한다. 그 공멸한 사례로 97년도의 YS가 있었고, 2007년도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당·청이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조정하고 조율할 것이다.
―한나라당이 최근 ‘좌클릭’ 정책으로 방향을 조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차기 총선·대선을 위해서도 중도 쪽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나는 언론에서 중도, 좌클릭 그렇게 얘기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한나라당에서 하고 있는 것은 친서민 정책을 강화하는 것이지, 좌클릭 정책이 아니다. 이게 ‘참보수’ 정책이다. 참보수라는 것은 가진 자가 자기의 것을 양보하고, 가지지 못한 자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기조는 ‘참보수’이지 ‘좌클릭’이 아니다.
―강재섭 전 대표가 지난 4·27 재보선에 출마했다가 손학규 대표에게 패한 바 있다. 이후 연락을 하고 있나.
▲그 뒤에 서로 연락을 자주 하고 있다. 당선 이후에도 연락을 나누었다. 요즘은 지구당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쉬운 지역구인 대구에서만 해보다가 익숙지 않은 수도권에서 해보니까 힘들 텐데, 마지막 정치생명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에 잘할 것으로 본다.
―박근혜 전 대표가 당내 대권주자로 독주하고 있는데, 친이 주자들의 부상이 필요하다고 보나.
▲그건 본인들의 문제다. 당 대표가 오히려 특정 주자를 도와주면 불공정 경선이다. 본인들이 역량을 발휘하고 국민 지지를 획득하도록 분발해야 한다. 나는 공정하게 관리할 뿐이다.
홍준표 대표에게 ‘야권 주자에 대한 평가’를 물었으나 “그건 예의가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그래서 여당 대표로서 민주당 손학규 대표에게 건네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이에 대해서도 “만나서 직접 하겠다, 가서 이야기할 걸 언론을 통해 미리 할 수 있느냐”라며 입을 닫았다.
홍준표 대표를 만나기 전날, 그가 쓴 자서전 두 권을 읽어보았다. 그중 2000년에 펴낸 <이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의 ‘축하글’은 바로 손학규 대표가 썼다. 손 대표는 이 글에서 홍 대표에 대해 “1999년 7월 19일, 내가 가지고 다니는 조그만 메모수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람은 깊이 알아야 한다. 사람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홍준표 의원을 만나서 나서 느낀 감동을 적어놓은 것이었다”고 표현한 바 있다. 또 그는 “홍준표 의원은 거침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유롭기에 용기가 있는 정치인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15대 국회 때인 지난 1999년 의원직을 상실한 홍 대표와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손 대표는 미국 워싱턴에서 생활하며 친분을 쌓은 바 있다. 당시엔 이명박 대통령도 미국에 머무르고 있던 상황. 홍 대표는 자서전 <변방>에서 “하루는 이명박 선배와 하루는 손학규 선배와 만났다. 나는 그 선배들과 교분을 두텁게 가지면서 많은 것을 배워나갔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손학규 대표가 쓴 축하글을 기억하나.
▲나더러 ‘자유주의자’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사고의 틀을 고정시키지 않고 역발상을 잘하는 사람이다.
―당시 손 대표가 자신보다 미국에 넉 달이나 늦게 온 홍 대표가 벌써 미국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었다고 썼던데.
▲내가 손학규 대표보다 밑바닥 인생을 더 오래 살고 잡초처럼 살았기 때문에 어느 환경에 가서나 바로 적응한다(웃음).
―거침없는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에둘러 표현하고 애매모호하게 말한 뒤에 빠져나가는 방식의 정치는 하지 않는다. 언제나 소신을 당당히 얘기하고 비판을 받는다. 내가 잘못 판단했을 때엔 바로 취소하거나 고친다.
―직접 만나보니 강경한 이미지가 느껴진다.
▲강경이 아니라 강직한 이미지라구 좀 써 달라(웃음). 소신과 배짱으로 나 홀로 여기까지 왔다. 더 바랄 게 있겠나.
―대권에 대한 욕심은 없나.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 경선에 나간 바 있는데.
▲그건(대권은) 지금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국가 경영의 꿈은 정치인이라면 다 있다. 그러나 지금은 ‘홍준표 시대’는 아니다. 자기 시대가 아닌데도 자기 시대를 고집하는 건 망하는 길이다. 나는 분수를 지킬 줄 안다. 내가 지금의 역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언젠가 홍준표 시대가 올게 될까.
▲내가 잘하면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누구의 시대인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지난 1월에 내가 ‘박근혜 시대’라고 얘기했다가 그 이야기 때문에 지금 이상하게 친박으로 몰리는 것 아닌가”라며 웃음을 보였다. 몸이 피곤한 상태였음에도 그는 ‘예상대로’ 거침없는 발언을 이어갔고 ‘까칠한’ 질문에 대해선 능하게 기자의 말을 자르거나, 자신의 말을 아꼈다. 홍 대표도 자신의 강한 개성을 의식했던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기가 좀 세다. 그래서 15년 ‘형님, 동생’ 한 이 대통령도 나를 장관 자리 하나 안 줬지, 허허허.”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준표 이름 안에 ‘빨간색’ 있다.
1. 술 안 마시는 ‘검사 출신 정치인’
‘검사 출신 정치인’ 홍준표 대표는 예상 외로 술을 잘 하지 못한다. 한나라당을 출입하는 기자들도 “홍 대표와 같이 술 마셔본 일이 많지 않다”고 말할 정도. 홍 대표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바로 그의 아버지와 큰 자형의 안타까운 죽음과 맞닿아 있다. 홍 대표는 인터뷰 도중 ‘평생의 멘토’로 삼고 있는 아버지와 ‘자신을 최초로 인정해준 분’이었던 자형에 대한 애달픈 기억을 털어놓기도 했다. 큰 자형은 항상 ‘우리 처남은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다’라며 만날 때마다 그를 치켜세워주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고 예순 하나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저 간암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리고 큰 자형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런데 어린 조카를 하나 남겨두고 서른 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알코올 중독자가 그리 무서운 줄을 그때 알았다. 낮에는 멀쩡하고 참 자상하다. 그런데 저녁만 되면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밤새도록 마신다. 집안 물건을 부수고 누님을 구타하고… 결국 큰 자형은 길에서 동사했다. 어릴 때부터 그걸 보면서 내가 어른이 되면 술을 안 먹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몸에 배어서 검사 때도 그 누구와 마셔도 폭탄주를 두잔 이상 마셔본 일이 없다.”
2. ‘빨간색 마니아’가 된 사연
홍준표 대표는 유명한 ‘빨간색 마니아’다. 심지어 ‘빨간 내복’까지 애용할 만큼 그는 빨간색을 좋아한다. “한나라당의 당색은 파란색인데…”라고 말하자, 그는 “그래도 이번 경선장에서 나를 지지하는 응원단들 티셔츠는 빨간색이었다”며 웃음을 보였다. 빨간색을 좋아하게 된 ‘특별한 계기’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설명하기 복잡하니까 물을 때마다 그냥 ‘홍가’라서 그런다고 대답했다. 원래 붉은 색이 러시아에 가면 정의와 열정을 상징한다. 정의(Justice)와 열정(Passion)을 줄이면 JP가 된다. 홍준표 이니셜이 JP 아닌가. 그래서 정치판에 들어오면서 붉은색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정치판을 정의롭게 하고 열정을 갖고 내 할 일을 하겠다는 그런 뜻이다. 그걸 어느 코디네이터는 색깔 마케팅을 했다고 하는데, 난 마케팅을 한 게 아니고 그런 의미를 담은 것뿐이다.”
3. 중고차 광고모델 하게 된 사연
홍준표 의원이 워싱턴에 머무르던 당시 우연히 광고 모델로 나섰던 일화가 있기도 하다. 어떻게 된 연유였을까.
“내가 워싱턴 가서 중고차를 사러 갔는데, 거기 사장이 충북 옥천에서 버지니아로 온 사람이었다. 나더러 사진 한 장 찍어달라면서 차 파는 데 도움이 좀 될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 했는데 차를 많이 팔았다고 하더라. 나는 한 8개월 있다가 한국으로 왔는데 그 뒤로 돈을 꽤 벌었다고 들었다.”(웃음)
4. 일요신문 지령 1000호에 대한 ‘덕담’
“<일요신문>은 대표적인 한국의 주간지다. 정치부 기사도 상당히 많이 취재해서 팩트 위주로 쓰기 때문에 주간신문 중에서는 제일 독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신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검사 시절부터 <일요신문>은 늘 봐왔는데, 정치판 들어와서 3선 이후부터는 바빠서 자주 못 보고 있다(웃음). <일요신문> 1000호를 축하드린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