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유스호스텔 탈바꿈, 지금은 코로나19 격리시설…고문 자행 ‘남산 지하실’ 6별관엔 종합방재센터 들어서
그렇다면 지금 이곳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또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무슨 교훈을 줄 수 있을까. 일요신문은 역사적 장소들을 다시 찾아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국가정보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있었던 남산이다.
“육본으로 가자.”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나 만약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은 존재한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을 암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차를 타고 궁정동을 떠났다. 차량엔 김재규 수행비서였던 박승주 대령과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동승했다. 김재규는 남산과 용산 사이 갈림길에 섰다. 남산엔 자신의 본거지인 중앙정보부가 있었고, 용산엔 육군본부가 있었다. 정승화 총장이 육본행을 권유했고 김재규는 이를 받아들였다.
인터넷이 없던 시기 정보는 곧 권력이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탄생한 중앙정보부장은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권력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나침반을 쥐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암살한 날 남산으로 차를 돌렸다면 한국 현대 정치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육본으로 행선지를 정한 김재규는 이튿날 검거됐다. 박 대통령이 서거했고, 2인자였던 차지철과 김재규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때 권력 중심으로 등장한 인물 또한 정보를 틀어쥐고 있었다.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1980년 3월 중앙정보부장 직을 겸했다. 당시 ‘정보의 독점’이 권력 구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중앙정보부는 1961년 5월 20일 설립됐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 경찰이 정보 최전선에 있었다면, 군사정권과 신군부에선 중앙정보부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에서 핵심 측근들이 중앙정보부장 직위를 맡아 권력 2인자 역할을 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영원한 2인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를 비롯해 ‘남산 멧돼지’란 별칭으로 불렸던 김형욱, ‘박정희 마지막 비서실장’ 김계원, ‘공작의 달인’ 이후락 등이 박정희 정부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기관 명칭이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된 뒤엔 ‘수지킴 사건’을 기획한 것으로 유명한 전두환의 복심 장세동이 안기부장으로 재직했다.
중앙정보부 본청은 퇴계로에서 보이는 남산 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통칭 ‘남산’으로 통했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시절 남산은 공포의 공간으로 통했다”고 회고했다. 이 관계자는 “본청으로 통하는 길목에 커다란 철문이 있었는데, 그곳에 잡혀 들어간 이상 몸 성히 나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던 까닭”이라고 덧붙였다. 이른바 586 운동권 출신 정치권 관계자들은 여전히 남산을 ‘제 발로 걸어나오기 힘든 혹독한 고문의 공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본청으로 활용했던 공간은 ‘서울시 중구 퇴계로26가길 6’에 그대로 남아 있다. 2006년 서울시가 안기부 본청을 인수했고, 이 건물은 서울 유스호스텔이란 여행 숙박시설로 탈바꿈했다. 2009년 서울시가 남산 르네상스계획을 발표한 뒤 서울시는 서울 유스호스텔을 비롯한 중앙정보부 건물들을 철거하려 했다. 그러나 인근에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통감관저터가 발견돼 철거 계획이 무산됐다.
2021년 현재 서울 유스호스텔은 여행 시설로 활용되고 있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 이후 임시로 격리센터 역할을 담당하는 서울시 생활치료센터 건물로 쓰이고 있다. 군부독재 시절 권력 2인자들의 집무실이 위치해 있던 6층은 통째로 ‘환자 숙소’가 됐다. 서울 유스호스텔이 코로나19 격리 시설로 활용되고 있는 까닭에 현재는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1995년 안기부가 서울시 서초구로 터전을 옮긴 이후로 가장 삼엄한 경비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유스호스텔 건너편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서울종합방재센터 건물이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이 바로 ‘남산 지하실’로 불리며 수많은 고문이 자행된 6별관이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끌려와 취조 받았던 장소다. 군부독재 시절 인권 탄압 중심에 서 현대사 아픈 기억들을 생산한 공간이다. 이 건물은 중앙정보부 본관과 지하로 연결돼 있는 구조로 설계됐다.
이밖에도 중앙정보부장 공관으로 쓰이던 건물은 ‘문학의 집’으로, 과거 중앙정보부 소유 부지 일부는 ‘인권숲’이란 산책로로 조성됐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남산엔 남파간첩 및 좌익사범을 색출하는 안기부 국내파트가 상주했다. 대북정보 수집을 하는 해외파트는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청사에서 활동했다. 내부 인사에 있어선 이문동 출신보다 남산 출신들이 중용됐다는 후문이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1995년, 양갈래로 나뉘어 있던 안기부 국내파트와 해외파트는 동시에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검사 없는 단독 수사’가 가능했던 안기부는 ‘안기부법 개정’ 등 김영삼 정부 견제를 받으면서 역할이 조금씩 축소되기 시작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검찰 권력’ 존재감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1995년 내곡동으로 거점을 옮긴 안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 다시 한 번 변화를 맞았다. 1999년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기관명을 바꿨다. 현대 정치사를 관통하는 ‘남산의 악몽’은 지나간 역사로 흘러가는 중이다. 서울 유스호스텔을 비롯한 인근 몇몇 건물의 뼈대만이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기억을 증명하는 증거로 남아 있다.
정치평론가 신율 명지대 교수는 ‘남산’에 대해 “기성세대 머릿속엔 ‘한번 가면 끝장나는 공간’이자, ‘무시무시하고 음산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곳”이라면서 “여전히 남산, 하면 정보기관이 무지막지한 공권력을 마구 휘두르던 공간이란 이미지가 남아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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