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RRY는 없네 영국 런던의 한 시민이 지난 10일 신문 가판대에서 <뉴스 오브 더 월드> 종간호를 집어들고 있다.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최근 휴대폰 메시지를 해킹해 취재에 이용했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결국 168년 역사를 마감하게 됐다. 종간호 1면에 ‘감사했습니다. 안녕’이라는 헤드라인이 보인다. AP/연합뉴스 |
처음 <뉴스 오브 더 월드>가 불법으로 왕실의 휴대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은 지난 2005년이었다.
그 무렵 <뉴스 오브 더 월드>의 왕실 담당 전문기자인 클리브 굿맨은 연일 크고 작은 특종을 터뜨리면서 승승장구했다. 당시 특종 가운데에는 윌리엄 왕자의 무릎 부상에 관한 기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용인즉슨 ‘윌리엄 왕자가 축구 시합 도중 무릎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당해 현재 치료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다지 놀랄 만한 내용의 기사는 아니었지만 이 기사를 본 왕실 보좌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자가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은 왕실 내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을 정도로 철저히 비밀에 싸여 있는 보안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보좌관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휴대전화를 도청하는 것 아니냐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시 몇몇 보좌관들이 자신들의 휴대전화에서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던 터여서 이런 의혹은 더욱 짙어만 갔다. 이를테면 듣지도 않은 음성 메시지가 이미 들은 상태로 표시되어 음성사서함에 저장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던 것이다.
결국 왕실은 런던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듬해 사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런던 경찰은 왕실 보좌관들에게 평소처럼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당시 용의선상에 오른 굿맨 기자와 그가 고용한 사설탐정 겸 휴대전화 해킹 전문가인 글렌 멀케어의 행동과 통화 패턴을 면밀히 감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몇 개월 후 굿맨은 다시 한번 특종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해리 왕자가 비밀리에 스트립클럽을 방문해서는 스트리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킬킬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해리왕자의 여친이 이 사실을 알고 매우 화가 났다는 후속 보도까지 내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굿맨과 멀케어의 은밀한 행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런던 경찰의 수사 끝에 이들이 왕실 측근들은 물론, 윌리엄과 해리 왕자의 휴대전화 음성 메시지를 해킹한 사실이 발각되고 만 것이다. 멀케어의 집을 수색한 경찰은 그곳에서 수천 명의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 그리고 91개의 음성사서함 비밀번호가 적힌 명단을 발견했다. 이로 인해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굿맨은 징역 4개월을, 멀케어는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았다. 해킹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던 당시 <뉴스 오브 더 월드> 편집장이었던 앤디 쿨슨은 모든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지만 쿨슨의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싶었던 불법 해킹 사건은 2009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의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가디언>에 따르면 전화를 도청한 것은 일개 기자의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뉴스 오브 더 월드> 차원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규모의 범죄 행위였다는 것이다. 당시 <가디언>은 “<뉴스 오브 더 월드>의 기자들이 유명인, 정치인, 스포츠 선수, 왕실 가족 등 3000명의 휴대전화를 해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이 사실을 부인했고, 경찰 역시 재수사 의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초 계속되는 압력에 못 이긴 런던 경찰은 결국 <뉴스 오브 더 월드>를 상대로 재수사를 시작했다. 지난 1월 고든 브라운 전 총리가 자신이 총리로 재직했던 2006년 <뉴스 오브 더 월드>와 같은 ‘뉴스인터내셔널’ 소속 신문인 <선데이 타임스>가 자신의 재산 현황과 재정 상태, 그리고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는 아들의 병원 기록을 해킹했다면서 수사를 의뢰했다. 또한 2월에는 한 스포츠 에이전트가 <뉴스 오브 더 월드>에 의해 자신의 휴대전화가 해킹당했다고 주장하는 한편, 멀케어가 자신의 정보를 굿맨 개인이 아닌 <뉴스 오브 더 월드> 데스크에 건넸다면서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끊이지 않는 의혹에 시달리던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지난 4월 웹사이트와 신문 지면을 통해 “과거의 행동에 대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2004~2006년 벌어졌던 휴대전화 해킹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했다. 하지만 배우 시에나 밀러, 홍보전문가 니콜라 필립스 등 일부 유명인사들은 사과와 합의금이 충분치 않다면서 이를 거부했고, 결국 법원을 통해 소송을 제기했다.
휴대전화 해킹 사건이 일파만파 번지자 7월 초에는 쿨슨 전 편집장이 재소환되어 조사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굿맨과 멀케어 역시 재조사를 받았다. 쿨슨은 편집장 시절 후배 기자들에게 “취재를 할 때에는 휴대전화 도청을 적극 활용하라”는 식으로 휴대전화 해킹을 독려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 런던 경찰은 이번 사건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40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휴대전화 해킹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문제는 초기 설정되어 있는 음성사서함의 네 자리 비밀번호였다. 보통 처음 휴대폰을 개통할 때 주어지는 비밀번호는 1234, 0000, 혹은 3333 등 단순한 조합으로 이뤄져 있으며, 대개 사용자들은 이 번호를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점을 기자들과 탐정들은 악용했다.
음성사서함 서비스는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음성 메시지를 들을 수 없거나, 혹은 해외에 나가 있을 경우, 네트워크 상태가 불안정할 경우 다른 전화기를 사용해서 원격으로 음성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로, 비밀번호만 알면 누구나 접속이 가능하다.
해킹 방법은 표적이 되는 인물에게 전화를 걸어서 운 좋게 받지 않으면 비밀번호를 눌러서 음성 사서함에 접근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문제는 휴대전화 해킹에서 끝나지 않았다. <뉴스 오브 더 월드>의 몇몇 기자들이 런던 경찰관에게 뇌물을 주고 왕실 가족과 측근들의 전화번호부인 ‘그린북’을 건네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실은 <뉴스 오브 더 월드>와 경찰관이 주고받은 이메일이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메일에는 정보를 제공한 경찰관에게 지불한 수만 파운드에 달하는 금액들이 적혀 있었다. 가령 ‘그린북’을 건네준 경찰관에게는 1000파운드(약 170만 원)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인들은 2006년 처음 해킹 사건이 터졌을 때 과연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졌을까 의심하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번 불법 도청 및 해킹 사건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특히 캐머런 총리는 쿨슨 전 편집장을 자신의 대변인으로 발탁했던 만큼 자칫하면 불똥이 정치권에까지 튀진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뉴스 오브 더 월드>를 비롯해 <더 선> <선데이 타임스> <더 타임스> 등을 소유하고 있는 ‘뉴스인터내셔널’의 제임스 머독 회장이 폐간이라는 초강수를 두면서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남은 불씨가 또 어디로 옮겨 붙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제임스 머독 회장은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의 아들로 후계자 ‘0순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 해킹 보도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줄줄이 재소환되고 있어 앞으로 이 일의 파문이 얼마나 커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피해자들에게 지불해야 할 보상금 액수 역시 커다란 골칫거리긴 마찬가지다. 4000여 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이 동시에 소송을 제기할 경우 막대한 금액을 보상해야 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현재 소송을 진행 중인 유명인사도 있고, 이미 소송을 통해 보상금을 받은 유명인사도 있다.
시에나 밀러의 경우, 지난 6월 런던고등법원을 통해 소송을 제기한 후 공식 사과와 함께 10만 파운드(약 1억 7000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받아냈는가 하면, 전 축구선수 겸 해설위원인 앤디 그레이는 2만 파운드(약 3400만 원)를, 그리고 유명 홍보전문가인 맥스 클리포드는 70만 파운드(약 120억 원)를 받았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납치 살해된 소녀 휴대폰까지…
▲ 왼쪽부터 고든 브라운, 시에나 밀러, 밀리 도울러 |
연예인 가운데는 휴 그랜트, 귀네스 팰트로, 시에나 밀러, 조지 마이클, 주드 로 등이 피해를 입었으며, 스포츠 선수로는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웨인 루니 등이 도청을 당했다. 정치인들로는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 고든 브라운 전 총리 등이 있다.
긱스의 경우 최근 불거진 제수와의 불륜 스캔들을 가장 처음 보도했던 <뉴스 오브 더 월드>를 상대로 “2005년부터 2006년 사이 전화통화 내용과 음성 메시지가 도청당했다”고 주장하면서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바 있다. 지난 4월 루니 역시 불륜 스캔들이 불거졌을 당시 자신의 휴대전화가 도청 당했다고 주장했었다.
납치 살해된 13세 소녀 밀리 도울러의 부모들 역시 실종 직후 딸의 휴대전화가 <뉴스 오브 더 월드> 기자에 의해 불법으로 해킹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망연자실했다. 당시 시신이 발견되기도 전에 도울러의 휴대전화를 해킹해서 취재를 했던 탓에 경찰 수사에 혼선을 빚었으며, 그로 인해 수사 속도는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살해된 소녀들인 홀리 웰스와 제시카 채프먼 부모들의 휴대전화 역시 도청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9·11 테러 희생자들의 전화를 해킹하려 했다는 사실은 전직 뉴욕 경찰관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그는 테러 발생 직후 <뉴스 오브 더 월드>의 기자가 자신에게 “희생자들의 휴대전화 통화내용을 건네주면 돈을 주겠다”며 접근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영국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휴대전화번호를 원했으며, 테러 발생 직후 녹음된 다급한 음성메시지나 통화 내용을 원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런던 경찰 고위 간부들의 전화까지 도청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는 이안 블레어 런던 경찰청장을 비롯해 모두 다섯 명의 경찰관들이 포함돼 있었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