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를 보았다. 경쟁 대상에게 “이건 모르죠?”하고 약 올리면서 상대방을 ‘빈 깡통’이라고 야유했다. 경박하고 야비한 토크쇼라는 인상이었다. 머릿속에 제대로 스며들지 않은 설익은 정책들이 소화가 되지 않은 채 토해져 나왔다. 연기도 삼류였다.
그걸 보면서 예전의 대통령 후보 토론회 중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에너지와 식량 위기가 닥쳤을 때 자급률이 적은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대처하겠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이 던져졌다. 식량 자급률부터 시작해서 외우기 힘든 수치가 머리 좋은 후보들이 입에서 줄줄이 나왔다. 마지막이 김대중 후보 차례였다.
“글쎄요. 만약 북한이 대한해협 쪽에 잠수함 한 척이라도 배치해 놓으면 식량과 에너지 보급이 끊기겠죠. 그런데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만이 진짜 본질을 알고 공감하는 것 같았다. 평택항에서 예멘으로 가는 LNG수송선을 탄 적이 있다. 에너지를 우리나라에 실어오는 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해적이었다. 말레이반도 입구 쪽과 소말리아 옆을 지나갈 때는 초긴장 상태였다. 공해에서는 법이 없는 것 같았다. 각 나라의 배가 알아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해적에 대한 방비책도 약했다. 갑판 여기저기에 총을 든 마네킹을 세우고 해적이 올라오지 못하게 철조망을 쳤을 뿐이었다. 핏줄 같은 에너지의 해상수송로는 언제든지 막힐 수 있었다.
중국의 몽니 한마디에도 수송로는 끊길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미국 함대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나라의 신세였다. 나라를 책임지는 대통령은 표를 의식해서 쇼를 해야 하지만 그 쇼의 나침반은 본질인 국익을 향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을 공격할 듯한 태도로 경제원조 및 군사원조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발전을 위한 종자돈을 만들기 위해 월남파병을 먼저 제의하기도 했다. 실리를 위한 위장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뒤로는 핵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정책이라는 화해의 몸짓으로 공산권에 거대한 수출 시장을 얻고 북한과의 대치를 슬며시 풀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도 기존의 남북이 하던 작은 정치 쇼를 벗어난 빅 이벤트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가서 미국을 아주 고마운 친구라고 했다.
우리는 무역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이 우선순위다. 땅덩어리가 커도 돈 없는 나라는 의미가 없다. 미국시장에 자동차와 휴대전화를 팔아서 석유와 식량을 사야 한다. 팔면 사주어야 했다. 그래서 광우병 시위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문은 열려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 그걸 사겠다는 국가의 원수에게 밤중에도 전화를 하면서 원자력발전소를 사달라고 고개를 굽혔다. 대통령은 이념보다 현실을 중시해야 할 때가 많다. 실리를 위해 겉으로는 굽어도 중심은 잡아야 하는 게 대통령인 것 같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다.
“미국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 ‘형님, 형님 백만 믿겠습니다’라고 하는 태도, 그게 자주 국가이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 있습니까.”
동해에 북한의 잠수함이 와도 미국의 항공모함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미동맹을 등뼈같이, 주체성같이 생각하고 미국이 없으면 한국이 없고 한국이 없으면 자신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대통령의 탄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들이 편을 나누어 싸운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의 투쟁이고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충돌이다. 대통령 후보들이 당선을 위해 작은 쇼를 하고 있다. 후보들은 맡은 연기만 잘하라는 선거대책본부장의 지시가 기사가 되고 있다. 어떤 후보가 국가를 위해 알맹이 있는 ‘빅쇼’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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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