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이미지 추락에 ‘불매 vs 구매운동’ 국민 분열…‘소수주주 동의제’ 도입 필요성 제기
급기야 정 부회장은 지난 5일 숙취해소제 사진과 함께 ‘멸공’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였다. 다음 날인 6일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이 들어간 기사에 또 멸공 해시태그를 올렸다. 중국과의 관계를 망각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자 정용진 부회장은 시진핑 주석 사진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으로 대신했으며 “멸공 언급은 위에 있는 애들(북한)을 향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8일에는 “멸치와 콩으로 맛나는 요리를 구상해봐야겠다”는 글과 함께 멸공 언급을 이어갔다.
'멸공' 이슈가 정치권으로 퍼져나가자 그 근원으로 지목된 정용진 부회장은 '더는 멸공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하지만 지난 11일 북한 탄도 미사일 발사 관련 기사 사진과 함께 “OO”이라고 적었다. 앞서 밝힌 '멸공을 쓰지 않겠다'는 의미가 이런 것이냐며 국민을 상대로 조롱하고 기만한다는 비난이 쇄도했으며 심지어 신세계이마트 제품과 스타벅스 제품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
정용진 부회장은 불매운동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롱조의 게시물을 올렸다. 'NO 정용진' 포스터와 함께 “업무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글을 올렸다가 “누가 업무에 참고하란다”로 수정해 게시했다. 이 포스터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인 'NO 재팬' 포스터를 본떠 만든 것으로 정용진 부회장의 멸공 발언에 반대하는 일부 누리꾼을 중심으로 커뮤니티에 계속 확산하고 있다. 불매운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용진 부회장의 일련의 행동들에 대해 '소신발언'이라는 취지로 응원을 보내며 구매운동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정용진 부회장의 일련의 SNS 활동들에 대해서도 ‘표현의 자유’ 논란이 일었다.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대기업 총수로서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용진 부회장의 위치를 감안하면 아무래도 전자보다 후자 쪽 의견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정용진 부회장은 물론 국민 한 개인으로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이를 누릴 권리가 있다. 하지만 현재 그의 위치는 세계 경제규모 10위권 대한민국의 재계 11위 기업 오너 총수다. 신세계그룹 임직원 그리고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신세계와 이마트 주주도 상당하다. 특히 우리나라에 중국은 경제와 무역에 대단히 중요한 국가다.
우리나라 헌법 제2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시돼 있다.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치고 전파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유는 남에게 구속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을 말한다. 이처럼 자유는 구속받거나 얽매이지 않는 것이고 이는 헌법에 보장돼 있다. 하지만 기업 총수의 자유는 조금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행정학 등에 따르면 기업 총수는 공공지도자(Public Leader)에 포함된다. 공공지도자인 정용진 부회장은 비록 개인적인 의견일지라도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욱이 정 부회장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76만 6000명으로 SNS상 영향력도 상당하다. 이창기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공지도자인 기업 총수가 개인적인 생각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처신은 위험하다”며 “공공지도자는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에 귀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도 “자신의 발언이 가져올 파급 효과를 고려해야 하는 게 재벌 총수로서 책임”이라며 “(정용진 부회장은) 이를 망각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재계 한 인사는 "정용진 부회장이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고 자사 제품을 홍보하는 등의 활동은 좋으나 정치적·이념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기업 총수로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재계 다른 인사는 "신세계그룹의 사업과 관련해서도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며 "신세계그룹 직원들과 협력사들 그리고 주주들을 생각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정용진 부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제2의 월마트도, 제2의 아마존도 아닌 제1의 신세계가 목표”라고 포부를 밝힌 만큼 개인적인 의견으로 그룹 이미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정용진 부회장의 최근 SNS 활동은 주주들이 소송을 통해 책임을 물을 수 있을 정도라는 의견도 있다. 박상인 교수는 “정용진 부회장은 신세계라는 집단 재벌에서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공적인 지위가 있다”며 “기업 가치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를 했기에 소수 주주들의 소송이 필요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정용진 부회장의 '멸공'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10일 신세계를 비롯한 신세계인터내셔널 등 그룹 주가가 급락해 주주들이 큰 피해를 봤다.
정용진 부회장이 지난해 11월 첫 정치 이념 관련 게시물을 게재한 뒤 이마트 브랜드 평판 순위도 밀린 것으로 전해진다. 구창환 한국기업평판연구소 소장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최근 이마트가 코스트코에 (기업 브랜드 평판 순위에서) 1위 자리를 뺏겼다”며 “부정적인 데이터가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신세계이마트는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도 직원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일궈놓은 이미지가 총수인 정용진 부회장의 '멸공' 구호에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짙어지고 있다.
한국노총 전국이마트노조는 지난 12일 성명서를 내고 “그룹의 주력인 이마트가 온라인 쇼핑 증가와 각종 규제에도 직원들 노력으로 타사 대비 선방하고 있는 어려운 환경에서 고객과 국민에게 분란을 일으키고 회사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는 정용진 부회장의 언행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며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자유이나 그 여파가 수만 명의 신세계·이마트 직원들과 그 가족들에게도 미치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정용진 부회장의 행보는 유통 대기업 신세계그룹의 소비 부문에도 민감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있다.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스타벅스코리아 등은 소비자의 구매가 곧 성과로 이어진다. 정용진 부회장의 노골적인 이념성향 노출이 자칫 소비자의 구매 행위를 정치 이념에 사로잡히게 하고 국민분열을 조장한다면 기업 입장에서도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스타벅스를 비롯한 신세계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과 구매운동이 함께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이창기 교수는 “사업가는 어느 곳에서든 제품을 팔 수 있어야 하므로 이념 논쟁에 휩싸이거나 개인적인 이념성향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내에 ‘소수주주 동의제(MOM․Majority of Minority)’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수주주 동의제란 대주주와 총수의 일탈을 막기 위해 경영상 결정에 소수주주들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대표적인 국가로 이스라엘이 꼽힌다.
이스라엘은 소수주주 동의제를 통해 주주총회에서 총수 일가의 급여를 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A 기업 총수가 자신의 발언으로 기업 가치를 떨어뜨렸다면 소수주주들이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명목으로 해당 총수의 급여 지급을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박상인 교수는 “소수주주 동의제는 재벌 총수의 경거망동을 제어할 수 있는 한 장치”라며 “이스라엘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이 제도를 통해 소수주주들이 재벌 총수를 평가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국장은 “소수주주 동의제는 기업 총수가 올바른 경영 행보를 이어가도록 해줄 뿐더러 소수 주주들의 막대한 피해를 막을 수 있다”며 “이 제도를 상법이나 상장 규칙에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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