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하이닉스 반도체. 왼쪽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오른쪽은 강덕수 STX그룹 회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지난 7월 25일 SK텔레콤과 STX가 하이닉스에 대한 실사를 시작하면서 하이닉스 인수전이 본격화됐다. 하이닉스 매각 작업은 벌써 세 번째다. 2009년 9월 효성의 단독 참여로 성사되는 듯했으나 참여를 철회함으로써 무산됐다. 2010년 2월 다시 매각작업을 벌였으나 인수하겠다는 기업이 없었다.
이번에도 무산되나 싶었다. 유력한 인수 후보로 거론됐던 현대중공업이 끝내 참여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데다 7월 8일 인수의향서 제출 마감시한 직전까지 어디 한 군데 하이닉스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기업이 없었다.
그런데 마감시간 25분을 남기고 SK텔레콤이 전격적으로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에 따르면 착잡한 분위기가 갑자기 들떴다고 한다. 게다가 마감 직전 STX도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SK와 STX 두 기업이 갑작스레 인수의향서를 제출했지만 실은 두 기업 모두 몇 개월 전부터 인수 작업을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이닉스 인수전이 열리기 전 SK도 후보군에 포함됐으나 시장에서는 SK가 인수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더 많았다. 최태원 회장의 선물투자 실패, SK증권 지분을 처리하지 못한 이유로 과징금 예고, 최재원 수석부회장의 비자금 수사, 통신사업 구조 재편, 정부의 기름값 압박 등 그룹 사정이 뭐 하나 좋은 게 보이지 않고 어수선했던 탓이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해봐야 시너지 효과가 거의 없다는 평가도 한몫했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SK가 인수전에 참여하면 책임지고 애널리스트 그만두겠다”고 호언장담할 정도였다. SK의 인수의향서 제출 후 해당 증권사는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해명했다.
STX는 인수전이 열릴 때마다 매번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는 단골 기업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회의적이었다. 인수전에 참여하기보다 그룹의 재무건전성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의견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STX 역시 SK와 마찬가지로 시너지 효과가 미미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인수의향서 마감 시한 전 재계 관계자는 “STX가 인수대금만 수조 원에 달하고 시너지 효과도 보기 어려운 하이닉스 인수에 실제로 참여할지는 의문이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두 기업은 예상을 깨고 인수전에 참여했다. 비록 재계 순위에서 3위와 14위로 큰 차이가 나지만 공교롭게도 두 기업은 비슷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인수전에 참여한 이유가 비슷하다. SK의 경우 그룹의 축인 통신과 에너지 사업은 국민정서와 직결되는 터라 사업을 꾸준히 기업에 유리하도록 영위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통신과 에너지는 또 내수 위주 사업이다. 내수 사업만으로는 성장은커녕 장차 재계 3위를 유지하기도 힘들다. 현재 통신에서는 KT가, 에너지에서는 GS칼텍스가 SK를 계속 위협하고 있다. 두 사업은 규제사업이기도 하다. SK가 10년여 전부터 중국 사업에 중점 투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까닭은 바로 통신과 에너지가 규제사업이기 때문이다. 국가 기간산업인 데다 정보와 직결되는 사업이라 어떤 국가든 다른 국가 기업에 쉽사리 사업권을 내줄 리 없다.
한 대기업 팀장급 인사는 “SK의 어려움은 몇 년 전부터 이미 예상된 바였다”며 “그동안 하이닉스가 매물로 나올 때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SK가 오죽하면 인수하겠다고 나섰겠느냐”고 말했다. 즉 인수전 참여 자체가 그룹 사정이 절박하게 돌아간다는 방증으로, 하이닉스 인수로 새롭게 도약하겠다는 의지가 내포돼 있다는 것이다. 하이닉스는 SK에 ‘신성장동력 마련’과 ‘제조업 진출’이라는 염원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STX의 인수 참여도 ‘신성장동력 마련’이라는 데서 목적이 같다. 조선·해운에 집중돼 있는 사업 편중을 하이닉스를 인수함으로써 해소해보겠다는 것. STX 측은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마련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하이닉스 인수에 자신감을 피력했다.
인수·합병(M&A)으로 성장했다는 점도 두 기업의 공통점이다. 선경직물이라는 섬유회사로 출발한 SK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 1994년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을 인수하며 퀀텀점프(Quantum Jump, 대약진)했고 오늘날의 재계 3위 그룹이 되었다.
IMF 외환위기 때 부실기업으로 전락한 쌍용중공업에서 시작한 STX는 대동조선(STX조선해양), 산단에너지(STX에너지), 범양상선(STX팬오션), 아커야즈(STX유럽)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재계 14위까지 뛰어올랐다. 샐러리맨 출신 강덕수 회장은 ‘M&A 귀재’로 불릴 정도다.
하이닉스 인수전은 지난 2005년 인천정유 인수전, 2007년 타이거오일 인수전에 이어 SK와 STX의 세 번째 격돌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를 끌고 있다. 지난 두 번의 인수전 모두 박빙의 승부를 펼치다 SK는 인천정유를, STX는 타이거오일을 각각 차지했다.
두 기업의 참여를 놓고 시장에서는 그다지 우호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있다. 무엇보다 시너지 효과가 미미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통신과 에너지를 주축으로 하는 SK나 조선과 해운이 주력인 STX나 하이닉스로 시너지 효과를 크게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3조 원은 될 것으로 추정되는 인수대금은 물론 인수 후 매년 조 단위로 쏟아 부어야 할 투자액과 관련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과연 그만한 자금력이 갖춰져 있느냐, 설사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반도체 경기가 들쭉날쭉한 데다 최근에는 오히려 꺾이는 추세인 점을 감안하면 하이닉스가 수조 원을 퍼부어도 괜찮을 만큼 매력적인 매물이냐는 것이다.
반대 의견도 있다. 과거 M&A를 몇 번 경험한 재계 인사는 “세계 2위 기업을 인수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라며 “국내에서 하이닉스를 무리 없이 인수할 수 있는 자금력에다 인수 후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업이 과연 몇 개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매물로서 하이닉스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시각이다.
자금력 면에서는 자체 조달만으로도 인수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SK텔레콤이 앞서고 있다. STX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국부펀드와 함께 인수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두 기업 모두 걸림돌은 있다. SK텔레콤은 곧 4세대 이동통신인 롱텀에볼루션(LTE)에 조 단위가 넘는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하이닉스 인수가 자칫 LTE 투자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나 배준동 SK텔레콤 사장은 “하이닉스를 인수해도 LTE 투자 재원은 충분하다”고 밝히고 있다.
STX의 자금력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크다.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유동성 위기설 등 그룹 재무와 관련해 흉흉한 소문을 달고 다녔다. 지금도 STX의 자금력과 관련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과연 STX가 하이닉스를 인수할 만큼 자금이 풍부한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이종철 STX 부회장은 “하이닉스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 인수 의지가 강력하다는 점을 시사했다.
하이닉스 인수전이 예상 외로 흥행에 성공하자 채권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당초 ‘채권단 보유 지분 15% 중 7.5% 이상과 전체 발행주식 10% 이내의 신주를 발행해 인수 기업에 매각한다’는 매각 공고를 냈지만 은근슬쩍 ‘구주를 더 많이 인수하겠다는 기업에 가산점을 줄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재계에선 채권단이 구주의 비중을 높일수록 인수하려는 기업의 부담은 가중돼 자칫 ‘승자의 저주’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하이닉스 지분 3.42%를 갖고 있는 외환은행의 대주주 론스타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직접 M&A를 숱하게 지켜봐왔던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제 막 실사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나온 말들을 전부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며 “매각 기준이나 정책이 당초 공고와 달리 변경되지 않는 이상 실사가 끝날 때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이닉스 인수전과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동안 방송이나 지면에 거의 광고를 하지 않았던 하이닉스와 STX가 광고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부품업체 특성상 굳이 광고가 필요 없다는 이유로 지난 10년간 TV 광고를 하지 않았던 하이닉스가 TV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으며 신문 광고지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STX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신문 광고를 시작했다.
이는 최근 M&A 시장에서 광고가 자사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지난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현대그룹이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본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보인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 간 광고가 비록 혼탁한 면도 있었지만 효과를 본 것은 틀림없다”며 “광고를 통해 이미지를 높여 판이 자사에 유리하게 흘러가게 하려는 목적도 분명하다”고 말했다.
현재 하이닉스의 인수대금은 2조 5000억~3조 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협상대상자는 6주간의 실사를 거친 후 9월 초 결정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정부가 SK 등 떠밀었다고?
워낙 덩치가 큰 데다 세 번째 만에 성사가 예상되기 때문일까. 하이닉스 인수전을 둘러싸고 재계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
먼저 SK가 왜 시너지 효과를 보기 힘든 하이닉스 인수전에 굳이 참여했느냐는 것이다. 이는 SK가 스스로 정부의 눈치를 본 결과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최태원 회장과 최 회장 친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의 불미스러운 사건, SK증권 지분 처리 문제, 기름값에 대한 정부와의 대립 등 최근 그룹 안팎으로 좋지 않은 일이 잦아지자 SK가 정부의 눈치를 보며 인수전에 참여했다는 것.
이 같은 소문은 한때 강력한 인수 후보였던 현대중공업과 관련해서도 나돈 바 있다. 세계 2위 기업을 외국계나 사모펀드에 내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기업도 없던 터에 ‘대권후보인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이 인수해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정부의 의중이 전달됐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의 인수전 불참으로 소문은 사그라졌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쪽은 세계 1위 메모리반도체 기업 삼성전자를 보유한 삼성그룹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최근 삼성증권이 낸 ‘SK텔레콤-투자의견 하향조정’이라는 보고서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이 보고서는 SK텔레콤에 대해 투자의견을 매수(BUY)에서 보유(HOLD)로 하향조정했고 목표주가도 20만 원에서 16만 9000원으로 뚝 떨어뜨렸다. 삼성증권 측은 “SK를 견제하기 위해 보고서를 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연구원이 다른 의도로 보고서를 내는 경우는 없으며 그랬다가는 큰일 난다”고 잘라 말했다.
또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하이닉스 종사자가 SK그룹 전체와 맞먹는 3만 명에 육박해 ‘1인당 생산성 최고’라는 평가를 받아온 SK텔레콤이 인수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인적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에 대해 SK텔레콤 측은 “유공 때도 그랬고 텔레콤 때도 그랬듯 우리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