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명 한 별에 살고 있는 생명공동체인데, 인간이 너무 잘났다. 잘나서 다른 동물들을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난 것인가, 메마른 것인가.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강퍅해질 것인가.
요즘 길을 걷다 보면 반려견들과 함께 산책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개와 고양이를 가족으로 여기는 일은 자연스럽거니와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을 아들이고, 딸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드물지 않다.
성인이 되어서는 개나 고양이를 키워본 일이 없지만 어렸을 적엔 내게도 강아지 루비가 있었다. 루비는 한쪽 눈만 검은, 흰 강아지였다. 루비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어찌 알았는지 언제나 마을 입구까지 나를 마중 나왔다. 그때는 서울에서도 강아지를 묶어놓지 않고 키웠던 것 같다. 거의 매일 루비와 함께 루비를 따라 온 동네를 뛰어다녔던 기억, 아마 그것이 지금도 내가 '플랜더스의 개'를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기억의 왜곡일까, 개도 사람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었다고 느낀다.
그런데 어느 날 루비가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루비가 보이지 않았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시골로 보내진 것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통곡을 했던 것도 같다. 어머니는 우는 나를 모르는 척 그대로 뒀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도 울고 있었다.
아마 아버지도 나를 달래다 달래다 화를 내신 것일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엔 나를 달랬던 아버지는 없고, 화를 내신 아버지만 있었다. 뚝! 화난 얼굴로, 나를 향해 “뚝” 하는 아버지. 나는 내 감정을 밀어 넣고 눈물을 그쳐야 했다. 그러나 울체된 눈물은 쉽게 그쳐지지 않았다. 거듭되는 아버지의 뚝, 소리. 체한 울음, 지옥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아버지가 무섭다고 느꼈고, 그 이후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 두려움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집을 짓고 살았다. 아예 우리 마음에 들어앉아 집을 짓고 사는 감정들이 있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 ‘나’를 돌봐주었던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생긴 익숙한 감정들이다. 그 감정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 밭에 씨앗으로 박혀 있다가 작은 외부 자극에도 쑥, 크게 자라나 순식간에 내 마음 전체를 물들인다. ‘나’를 뒤흔들며 내 삶의 무늬를 만들거나 삶의 길에 장애를 만든다.
우리는 느낀다. 당연히 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빼앗겼을 때 고통을 느끼고, 감정이입이 된 어떤 존재가 학대를 당하고 있으면 분노를 느낀다. 문득문득 두려움을 느끼고, 쓸쓸함을 느끼고, 허기를 느끼고, 불안을 느끼고, 꿈을 느낀다. 때때로 기쁨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그 감정들은 신호다.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억울한지, 얼마나 안타까운지, 얼마나 무서운지를 누구보다도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내가 믿을 수 있는 그대에게 보내는 마음의 신호다.
감정은 무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감정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다 보면 이상하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힘이 생긴다.
내게 닥치는 감정의 방문을 막을 수는 없겠다. 물론 막을 필요도 없다. 감정이 억압되면 마침내 폭발해서 내 마음을, 내 삶을 한순간에 날려버린다. 감정들이 와서 실컷 놀게 하자. 그러나 그들이 내 마음에 집을 짓게 할 필요는 없겠다. 감정들의 집이 아니라 ‘나’의 집이니까. ‘나’는 그 감정들을 돌보는 어머니여야 한다. 그 어머니가 내 안에 있다.
에픽테토스의 말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마음의 중심이다. 자극이 많은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그것이 당신 마음 방의 분위기를 만드는 방 자체이기를!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